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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Dec 18. 2019

서울 살이는

또는 그저 살이는





어쩌면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르게 됐다. 주말에 본가에 내려갈 일이 있어 엄마 아빠 앞에서 이러이러한 계획으로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발표를 하니 엄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본가로 내려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라고 한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엄마의 말에는 이제 대답도 지쳐 그저 웃음으로 넘기지만 언제나 속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존감이 가득 차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할 때는 매번 하는 말이니까 하며 흘려듣지만 내 뜻대로 생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마음이 들 때는 그 말이 속에 콱 박혀서 상처가 된다. 문제는 잘 살고 있다 자부하는 날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굳은살이 생길 법도 한데 늘 새롭게 아프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내가 본가를 나간 이후부터 늘 언젠가 본가로 돌아올 것이라고 혹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 바람이 항상 저런 말로 나온다.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는 취직하면 그 바람이 잦아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내 판단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대기업을 다니고 있다면 본가로 내려오라는 말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초라해지기도 했다. 엄마는 이렇게 내 생활에 조금의 덜컥거림이 보일 때마다 내려오라는 말을 넌지시 건넨다. 그건 엄마의 바람일 뿐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나를 보호해보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속에서 들리는 질문이 있다. 여기에 있으려는 이유가 뭐냐고.



계획 진행을 승인받고 돌아오는 길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재테크에 관련된 유튜브 영상들을 보고 있었다. 맨날 예능이나 강아지, 고양이 영상만 보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급하게 그런 걸 보고 있는 내 꼴이 웃겼다. 다음날 이사 갈만한 집들을 알아보다가 나는 다시 한번 외롭고 초라해졌다. 방은 좁았고 그에 비해 가격은 터무니없었다. 이 집에 산 기간이 꽤 길었던 덕에 늘 옮겨 다녀야 하는 무주택자의 현실을 조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감상에 빠질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서울에 사는 게 무슨 허락이 필요하냐고 살고 싶으면 사는 거지. 하지만 자꾸만 허락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말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버리는 내가 다니고 있는 일터와 거기에서 버는 돈에 비해 턱없이 비싼 집값은 나에게 자꾸 묻는다. 왜 여기에 있으려 하냐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오기를 결정하기도 하고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친구들 중에도 나와 비슷하게 서울에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떠난 이들이 있다. 직장 때문에, 또는 지쳐서, 사람이나 일 때문에 상처 받아서, 결혼해서 등등 각자의 이유들로 떠났다.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동지 한 명을 잃는 것 같아 붙잡고 싶다가도 친구를 만나 그 결심이나 사정을 들어보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잘 결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결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에게 묻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있으려는 이유가 뭐냐고. 



아직도 기억나는 몇 달 전 꿨던 꿈이 있다. 집으로 누군가 침입하려고 창문을 두들기고 깨부수는 꿈이었다. 그런 꿈은 종종 꾸곤 하니 꿈이 특별했다기보다는 내가 꿈속에서 하고 있던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 쉽게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꿈속의 나는 이 와중에도 이 사건 때문에 부모님이 본가로 내려오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집에 들어온 괴한을 피하려고 도망치며 몸을 격하게 움직이다가 잠에서 깼다. 현실로 돌아와 되짚어 보니 엄청난 위기의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웃기고 황당했다. 이불을 반쯤 덮고 잠도 덜 깬 채로 그렇게도 여기에 있고 싶으냐고 자조했다.


이렇게 마음이 헛헛한 순간에는 ‘서울살이는’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조용히 흥얼거리다가 노래를 틀어본다. 오지은이 조용한 저음으로 이야기하듯 노래를 부른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꼭 내 마음 같은 가사에 분명 오지은도 다른 곳에서 서울로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후에 이 노래에 관한 오지은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서울 토박이라고 했다. 속인 사람도 없는데 혼자 속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 어쩌면 서울살이도 부산살이도 뉴욕살이도 모두 비슷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서울’이 문제가 아니라 ‘살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울’에 살고 싶어 하는 내가 초라하고 괜히 오기 부리는 것 같을 때 이 노래를 읊조리고 있나 보다. 언젠가 이 곳을 떠나게 될까? 계속 머물게 될까? 알 수 없다. 다만 서울살이는의 마지막 가사처럼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가끔 행복하고 자주 헛헛할 거라는 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다.  

서울살이는 조금은 즐거워서 / 가끔의 작은 행복에 시름을 잊지만

서울살이는 결국엔 어려워서 / 계속 이렇게 울다가 웃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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