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다녀오는 길에
새해를 지독한 감기로 시작했다. 몇 년 사이에 살짝 몸살 기운이 돌거나 콧물이 나는 가벼운 감기에 걸린 적은 있어도 누가 봐도 병자 같아 보이는 감기는 꽤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앓아누워서 지금과 꼭 같은 증상으로 아프던 몇 년 전의 나와 그때의 상황이 자꾸만 겹쳐 떠올랐다. 3개월쯤 동남아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언니는 따뜻한 기후의 지역에서 오래 머물다 갑자기 추운 곳으로 오면 혈관이 수축해서 몸살이 꽤 심하게 온다고 말했다. 그러니 돌아가서 꽁꽁 잘 싸매고 다니라고. 그 말을 들었고 알고 있었음에도 오는 병을 막을 수 없었다.
감기가 들면 조금만 아파도 얼른 병원에 가는 사람이 있고 감기는 원래 불치병이라며 끝까지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목이 완전히 잠기고 밤새 기침을 하고 침 삼키는 것조차 아플 정도로 편도가 부어 있었으면서도 이불을 둘러 싸매고 며칠 버티면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낫기는커녕 며칠이 지나자 기침이 너무 심해졌다. 누워 있어도 길을 가는 중에도 말을 하려 해도 밥을 먹을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사레들린 것처럼 너무 심하게 나서 눈물도 줄줄 흘렸다. 그렇게 며칠을 하니 배가 당기고 머리까지 아팠다.
거의 2주쯤 무식하게 앓다 보다 못한 이의 성화에 집 앞 병원에 갔다.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는 약을 며칠 분 처방해 줬고 병은 차도가 없었다. 그는 성의 없게 약만 지어줬다며 병원을 향해 투덜거리면서 어릴 때부터 감기 걸릴 때마다 갔던 자신의 동네에 있는 병원으로 나를 데려다 놨다. 의사는 나를 혼냈다. 약만 받아먹고 나을 상태가 아니라고 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을 안 왔냐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며칠 전 친구들에게 내 목소리 신기하다고 들어 보라고 까불고 다니던 내 모습을 봤다면 더 화를 낼까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큰 병 걸린 환자 보호자 마냥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그는 의사에게 혼났다는 내 말에 안쓰러움과 의기양양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서 나와서는 약을 먹어야 하니 밥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동네 단골 매운탕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는 직접 요리라도 한 것처럼 어서 많이 먹으라며 반찬들을 내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매운탕에 들어 있는 곤이들을 건져 내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나는 그저 슬며시 웃으며 밥을 젓가락으로 떠먹기만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알약을 잘 못 삼켜 한 알씩 먹는 나를 보면서 또다시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플 만큼 아파서인지 그의 말대로 그 병원이 용했는지 며칠 뒤 몸은 괜찮아졌다.
감기에도 경험이 도움이 되는지 이번 감기의 증상이 그때와 꼭 같아 그때보다 빠르고 순순히 병원을 찾았다. 그가 알려준 용한 병원은 아니었지만 병원에서 하는 말은 비슷했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졌다. 나 병원 다녀왔다고 주사도 맞고 약도 먹어야 된다고. 그러고 싶지 않아서 계속 병원을 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의 아픔에 호들갑을 떨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 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저 병원에 가자해서 가고 밥을 먹자 해서 먹었다 거기까지만 생각했을 뿐 그 마음 씀씀이에 대해서는 헤아리지 못했다. 내 기침이, 내 감기가 세상 큰일 인양 호들갑 떨어주는 그 마음, 아픈 나보다도 나를 더 짠하게 봐주는 그 마음.
밥을 먹고 약을 먹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혼자 굳이 밥을 먹기엔 시간도 애매하고 입 안이 깔깔해 녹차라테로 속을 채우고 약을 먹으며 또 한 번 그때의 그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고마움을 전할 길이 없으니 약을 삼키며 그 날의 그를 떠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언젠가 나도 다른 이에게 쓰는 것으로 그 고마움을 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