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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an 14. 2020

어린아이를 보듯

친구를 보는 날





얼마 전 만삭인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깔깔 대고 아무 말이나 떠들고 잘 놀다가 헤어질 때 갑자기 눈물이 났다. 출산을 앞둔 친구가 고생할 생각을 하니 뭔가 짠했다. 둘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백화점 입구 앞에서 부른 배 때문에 하기도 힘든 포옹을 하며 엉엉 울었다. 좀 감정이 진정되고 나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내가 요즘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가 싶기도 했다. 결혼하고 애를 낳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내가 바라보는 친구는 여전히 애기 같았던 모양이다. 


며칠 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꽤 오랜만에 만났다. 매번 입버릇처럼 자주 보자고 다짐하지만 겨우 1년에 한 번쯤 보고 있다. 1년 치 밀린 소식을 말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한참 대화가 오갔다. 그러다 친구가 몇 달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명절을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셔서 황망했다고 말하며 친구는 눈물을 보였다. 그 순간 나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탁자를 보며 시선을 내렸고 친구는 눈물을 멈추려 천장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친구를 위로해 주지 못하고 왜 같이 울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전히 친구들을 초등학생,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대할 때 그를 처음 만나게 된 시절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는 언제나 그때처럼 말하고 대학교 때부터 알게 된 친구는 여전히 우리가 대학생인 듯 대화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이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은 아픈 일을 겪었다고 하면 마음이 쓰이는 정도가 조금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는 학창 시절 늘 함께였지만 대학을 오고 나서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둘 다 선뜻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서로의 상황 때문도 있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대학 졸업 무렵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0살이 넘어가는 요즘에는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다만 아프신 지가 꽤 오래되셔서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했었다. 그전까지 거의 가 볼 일 없었던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상복을 입고 있는 친구를 보는 순간 그런 건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분명 대학 졸업을 앞둔 그가 초등학생으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없었으면 좋았을 장례식장의 만남으로부터 2년도 넘었을 때였다. 그런데도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매일 보고 매일 전화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아이처럼, 엄마를 잃은 초등학생처럼, 엄마를 잃은 친구를 본 아이처럼 서로를 안고 엉엉 울었다. 그 경험은 꽤 강렬해서 빈소에 서 있던 너무도 조그맣게 보이던 친구의 모습을 한동안 자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씩은 꼭 보자고 노력하게 되었다. 친구에게는 엄마의 기억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고 나 역시 쌓여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싶었다. 



친구가 아이처럼 보이는 일은 그런 극적인 상황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친구들이 어른의 단계로 들어서는 것 같은 결혼이나 출산이나 또는 아픈 일들을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꾸 눈물을 보였다. 다 크다 못해 늙어가고(?) 있는 친구들이 꼭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계로 발 딛는 것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그래서 주책맞게 축하해야 할 결혼식에서도 울고 출산 소식에도 울고 슬픈 일에도 울고 눈물이 많아졌나 보다. 어쩌면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세계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사회생활에서는 점점 책임져야 할 무게가 커져가는 어른으로 살아야 하고 또 언제나 능숙해질 수 없는 어른인 척하느라 끙끙대고 있으니 적어도 이렇게 오랜 친구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때로는 차근차근 쌓아 온 우정의 시간들을 즐겁게 추억하면서, 서로를 아이처럼 바라봐주고 아이처럼 행동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친구에게서 기쁜 소식을 들으면 더 많이 웃고 슬픈 소식을 들으면 더 많이 울고 열 받는 일을 들으면 더 많이 대신 화내 줘야겠다고 다짐할 필요도 없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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