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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an 22. 2020

결정적이고 사소한 장면은

귤껍질을 덖으며 





A는 귤껍질을 프라이팬에 덖고 있다. 조용하던 팬에서 껍질의 물기가 날아가며 소리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껍질을 깨끗이 씻어 귤 알맹이를 까먹고 하루 이틀 정도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가 잘게 찢어서 프라이팬에 담았다. 불이 세면 쉽게 탈 수 있어서 약한 불에 올려 두고 손으로 온도를 가늠하면서 계속 뒤집어 주기를 반복한다. 단순한 반복 행동에 껍질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가 항상 마음이 쓰이는 누군가를 생각했다가 또 며칠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며칠 전 만났을 때 B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살짝 굽은 등이 항상 어딘가 아파 보이는 인상이라 약해 보여서 늘 마음이 쓰이지만 만나서 대화를 하면 강단 있게 잘 살고 있는 모습에 되려 A가 위로를 받고 힘을 내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폭풍 같던 감정은 다 정리된 듯 B는 하얗게 웃고 있었지만 말의 마디마디를 이을 때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A. 나 본가로 돌아가려고.” 


몇 주 전 B와 만나서 술을 마셨던 날이 떠올랐다. 둘 다 취할 만큼 취한 새벽 A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A는 너무 추우니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사서 마시며 집에 가자고 했다. 그때 B는 돈 아까우니 먹지 말고 얼른 가자고 했다. A는 그거 얼마 한다고 내가 사겠다고 혀를 꼬아가며 말했다. B는 한사코 네 돈도 내 돈도 아깝다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상하게 그 날이 겹쳤다. 차 한 잔 사 먹는 돈도 아까워할 만큼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고 돈을 모으던 B는 갑자기 왜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모습이 된 걸까. A는 당황해서 B를 바라봤다. B는 창 밖 어딘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이만하면 악착같이 일한 것 같아. 거의 매일 막차 시간까지 일하고 시간 맞춰서 죽도록 달려가서 지하철을 타. 어느 날은 그마저도 못 타서 택시를 타. 집까지 택시비가 3만 원이 나오는데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택시비는 만 오천 원 한도까지라서 집 앞까지 가 달라고 하지 못하고 큰 길가에서 내려. 저번에 와 봐서 알지? 큰길에서 내 방까지 엄청난 오르막인 거. 이미 다음날이 되어버린 시간에 오르막을 걸어가면서 생각했어. 6시간 후에 다시 내려와야 되는 이 길을 나는 왜 오르고 있는 걸까? 집에 들어가서 불을 켜. 예전에는 밥에 엄청 집착했어. 그 시간에도 주말에 끓여서 얼려놨던 밥에 국을 데워서 마시듯이 먹기도 했어. 엄마는 늘 말했지.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그것만 해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고. 그런데 어쩌면 반대일지도 몰라. 밥을 잘 챙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프지 않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어느 날부터는 싱크대 앞에 서서 밥을 먹는 그 시간 10분을 더 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냥 씻으러 들어가. 근데 그때는 회의감을 느낄 정신도 없었어. 그냥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내가 하루 종일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똑같이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는데 벌레가 벽에 붙어 있더라. 집이 공원 근처라 그런지 가끔 벌레들이 들어와. 그러니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너무 짜증이 나고 피곤한 거야. 평소 같았으면 호들갑을 떨고 난리를 쳤을 텐데 그냥 딱 보는 순간 방에 있는 물건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어. 벌레를 향해서 책을 집어던졌어. 책이 조금 빗맞아서 벌레가 미친 듯이 빠르게 벽 쪽으로 기어가더라.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손이 부들거리고 몸이 열 받아서 터져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잡히는 물건을 아무 거나 막 집어던졌어. 뭔가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진 벌레를 악을 쓰고 울면서 책으로 계속 내리쳤어. 문득 멈추고 방 안을 둘러보니 모든 게 조용하더라. 정말 이상했어. 애초에 조용했지. 나만 빼고 전부. 나 혼자 난리를 친 거였더라고. 갑자기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머쓱해서 눈물도 쏙 들어가 버리더라고. 벌레가 들러붙어서 너덜너덜하고 더러워진 책 표지를 뜯어 버리고 마구 던진 물건들도 다시 정리했어. 그러면서 머릿속도 정리가 되더라. 그만해야겠다고. 그만하면 된다고. 그만하면 됐다고. 이상해. 회사에서 내가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욕을 먹어도, 새벽에 들어갔다 새벽에 나와도, 이번 달만 이번 주만 계속 반복하며 직원을 뽑아주지 않을 때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지는 못했었던 것 같아. 그냥 속으로 드러워서 올해까지 다니고 그만둔다고 중얼거리기만 했을 뿐. 근데 그 사소한 순간 결심이 서더라. 정말 이상했어.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가려고. 좀 쉬고 싶어. 아무 계획 없이. 여기 있으면 월세에, 밥값에, 단지 나를 살려 놓는 것만으로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앗 뜨거!”

멍하니 B의 말을 떠올리다 손을 오래 머물렀더니 금세 팬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 뒤에 B에게 뭐라고 했던가. 너무도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라 뭐라고 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잘했다고 했던가, 고생했다고 했던가. 알게 모르게 A에게 B는 의지할 구석이었다. 여태까지 해왔던 서로의 모든 고생들을 잘 알고 있고 그런대로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잘 선택해왔다고 알아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당황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충고도 조언도 할 수도 없었다.      


아마 지금쯤 B는 팔고, 버리고 남은 얼마 없는 짐을 싸서 본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어느덧 귤껍질의 물기가 다 날아가 바삭바삭한 소리만 팬 안에 가득했다. 불을 끄고 채반에 옮겨 남은 열기를 식혔다. 다 식은 껍질들을 조그마한 유리병에 담았다. 많아 보이던 껍질이 작은 유리병 안으로 다 들어갔다. A는 병을 살짝 흔들어 고르게 표면을 정리한 뒤 뚜껑을 닫고 조그마한 리본을 묶었다. 그리고 상자에 완충제와 병을 넣고 테이프로 꼭꼭 밀봉했다. 이틀이면 병은 B에게 도착할 것이다. B가 그 상자를 뜯고 귤피차를 마시며 이 곳에서의 아픔은 향긋한 귤껍질 향과 함께 다 날려버리고 따뜻한 귤피차 한 모금에 소진한 기력을 조금 챙겨서 잠시라도 미소 지을 수 있기를 A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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