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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Feb 10. 2020

오래된 편지가 말해주는 것들

이삿짐을 정리하며 




이삿짐 싸는 시간을 오래 걸리게 만드는 함정은 옷도 아니고 식기도 아니고 사진과 편지가 아무렇게나 담겨 있는 가방이다. 평소에는 꺼내 볼 생각도 없고, 창고 깊숙이 처박아두고 존재 자체를 잊고 살던 편지와 사진들이 가득 담긴 꾸러미는 이사할 때 겨우 빛을 본다. 열어볼 필요 없이 이삿짐 담는 상자로 옮기면 되는데 꼭 열어보게 된다.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든다. 짐을 싸다 말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사진과 편지들을 찬찬히 본다. 정리를 꼼꼼히 해두지 못한 탓에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것들을 추첨하듯 뽑아본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한껏 꾸미고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도 있고 스티커 사진도 있고 고등학교 졸업식 때 사진, 취업준비할 때 찍은 증명사진, 여권 갱신할 때 찍은 사진도 있다. 사진 속의 모두는 다들 웃고 있다. 사진을 찍는 순간을 넘어 그 시간들로 돌아간다.      


편지들도 읽어본다. 당시 재수를 하고 있던 친구가 보낸 편지를 꺼냈다. 그때 나는 스키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내가 친구에게 스키 선생님에게 고백할 거라고 말했었나 보다. 친구는 내가 백 퍼센트 까일 거라며 나를 뜯어말리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작 친구에게 내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잊었지만 다행히 그 편지 덕이었는지 소심한 성격 탓인지 고백은 하지 않았다. 10년도 넘은 친구의 걱정도 새삼 고마웠고 10년도 넘었지만 쓸데없는 흑역사를 만들지 않는 나를 다시 칭찬했다.     


두 번째 뽑기는 2012년 연말로 나를 데려다 놨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엄청난 우표와 소인이 찍힌 봉투에 담겨 있던 짙은 카키색에 솔방울이 그려진 카드였다. 친구는 공부를 걱정하고 있었고, 나를 응원했고, 보고 싶은 마음을 카드에 담아 먼 곳까지 보내주었다. 신기하게 그 카드를 펼치자 우편함에서 처음 그 카드를 발견하고 신나서 뛰어올라가던 그 당시 살고 있던 집의 계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서 카드를 뜯어 읽었다. 그리고 아주 늦은 새벽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서 친구에게 답장을 쓰던 순간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듬해 우리는 미국에서 만났고 카드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했던 시간들도 함께 따라왔다.      



또 한 번 뒤적여 뽑아 본 편지는 아주 오래전 연인이었던 이의 편지였다. 다 정리해서 버린 줄 알았는데 연애 초기의 편지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당시 조금 긴 여행을 떠나 있던 나에게 쓴 편지였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에게 아픈 말로 상처를 주기 전이었고, 헤어짐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 편지는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우리가 서로 무슨 말을 했고 어떤 결과에 처해 있는지 전혀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그 편지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무슨 생각을 했었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결과를 알고 읽어보는 편지의 어느 문장은 그저 웃음이 나고 또 어느 문장은 조금은 씁쓸했다.     

 

그는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다짐들, 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모했고 열렬했던 그 다짐들을 지금 다시 보니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물을 수 없다. 인연을 다시 잇고 싶지는 않지만 편지를 읽으니 역시 따라오는 기억들은 어쩔 수 없다. 그때 시작의 찬란함을 잘 기억했다면 어쩌면 지금도 우리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그와의 인연은 죽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의 기억을 들을 수도 만날 수도 없으니 내가 기억하는 대로, 내가 잊는 대로, 내 멋대로 기억하다 이렇게 아주 가끔 떠올랐다가 서서히 흩어져버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니 친구들과의 추억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감사했다. 우리는 여전히, 물론 그때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하지만 이런 너무도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고 그때의 바보 같았던 행동들을 같이 추억하고 웃을 수 있다. 내가 잊은 기억을 친구가 대신 기억해주기도 한다. 새삼스레 오래되고 낡은 편지봉투가 우리가 쌓은 세월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 괜히 만지작거리며 다행이라 중얼거렸다.      


우리의 상황은 제각각으로 이리저리 갈라지고 있다. 재수를 했고 어학연수를 가기도 했고 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고 유학을 가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거칠게 흘러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인연을 놓지 않고 가까워졌다 멀어지면서 같이 흘러 왔다는 것을 그 오래된 편지가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린 날들의 추억과 잊고 지내던 장면, 마음과 말들을 하나씩 보다 보니 짐은 얼마 싸지도 못하고 하루가 다 가버렸다. 사진과 편지들은 그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다음 이사 때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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