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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n 01. 2018

사랑을 외면하다

늦은 사과의 편지




그때 너를 사랑했으면서도 나는 그 감정을 외면했다. 네가 없어야 내가 정신을 차리고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너를 억지로 떼어 놓고 된 게 고작 지금의 나다. 나는 왜 너와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다 네 잘못이라고 악을 썼지.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아. 네 잘못은 없다는 것. 내가 떠날까 불안해한 것뿐. 그런데 그것도 사실이 되었으니 네가 불안해했던 게 그게 무슨 잘못이겠니.   

   

그때는 정말 몰랐어. 결과를 알고 행동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이야기는 결말을 알면 앞선 이야기들의 의미를 알게 되고 수학 문제도 답을 알고 보면 쉬워 보이잖아. 그땐 뭐든 어려웠고 보이지 않았어. 그 어려움, 보이지 않음을 너랑 조금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그런 여유도 없었지.


 너를 나한테서 뜯어내고 된 게 지금의 나라니 웃기다. 엄청 형편없네. 


나는 너를 부정하면서 내 잘못된 선택을 잘 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도움을 받았어. 그건 연쇄 작용이었으니까. 그 선택이 잘 못 됐다고 정리가 되어 가니 너를 외면했던 말과 시간들이 초라하고 미안하고 후회되더라. 나는 후회를 조금씩 나눠서 했어. 헤어지고는 하나도 없던 후회를 1년, 2년 지나면서 나눠서 하고 깨닫고 벽에다 대고 사과를 했다. 이게 내 마지막 후회일까. 여전히 어렵고 보이지 않는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너를 만나면서도, 헤어져서도, 최근까지도 애써 외면했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지. 내 마음속 저 구석에서는 뭘 알고 그런 소리 하냐고 외치는 것 같은데 그냥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건 너를 인정하는 것과 내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같은 선상에 있었으니까. 그때까지는 아직 완전히 인정할 수 없었나 봐.  


날씨가 슬슬 쌀쌀해지던 어느 날 늘 걸어가던 길을 걷다가 나는 너를 사랑했다는 걸 알았어. 엄청 오래 걸렸지. 그리고 너무 늦었지. 되돌리기를 바라지 않는 나는 차라리 돌릴 수도 없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알게 된 게 다행이지만 그때의 너에게 정말 미안해. 내 감정을 숨기고 너를 모질게 대하고 너를 불안하게 만들고 결론과 상관없이 우리가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너는 어쩌면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걸 모른다는 걸. 눈을 보면 알 수 있잖아. 행동 말고 눈을 보면. 나는 알았거든. 네 눈을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걸 너는 알고 있었나 봐. 그래서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봤구나. 


나처럼 이렇게 늦게 고백하는 사람도 있을까? 사랑을 시작할 때도 아니고 사랑이 한 참 아름다울 때도 아니고 끝날 때도 아니고 끝나고도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추리게임에서 게임이 끝나 다들 범인을 알고 난 뒤에도 혼자만 모르다가 결국 끝까지 모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은 그 때야 진실을 알게 된 사람처럼.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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