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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Oct 04. 2018

다른 우주를 찾아 떠난 날

그 날의 장면을 그리며  





여권 기간 만료가 다 되어간다는 생각에 여권을 꺼내 사증란을 한 장씩 넘겨 보있다. 출입국 도장에, 정리 못한 비행기표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친구와 간 여행도 있었고 가족과 간 여행도 있었고 혼자 간 여행도 있었다. 절반 정도가 혼자 간 여행이었다. 



나는 왜 혼자 떠났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만나러 갔던 여행이 절반쯤이었다. 다 그리운 사람이었다. 보고 싶고 밤새 얘기해도 지루하지 않고 온갖 이야기들이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잊지 못해서 만나고 싶어서.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무한도전의 한 장면처럼 나와 아어이다가 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런 사람들은 왜인지 멀리로 떠나기만 하길래 내가 만나러 갔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아쉬웠던 건지 언제나 아쉬웠던 것을 또 아쉬워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길지 않다고 하면 찰나 같은 삶에 더 짧은 시간을 보내는 거라고 생각하니 더 아쉬웠을까. 


대화한다는 것은 나의 우주를 보여주면서 다른 차원의 우주를 살짝 엿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화를 한다고 누구에게나 내 우주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우주를 쉽게 볼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노력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 나에게 그 사람들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나보다 어린 사람도 있고 나이가 같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하기도 했고 둘이서 대화하기도 했다. 오래오래 알던 사람도 있었고 1년을 채 만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퍼내고 퍼내도 할 말이 속에서 퐁퐁 솟아났다. 말이 물처럼 흐르고 흘러옴에 막히지 않고 끊이지 않았다. 만나고 만나도 지루함을 느낀 적이 없었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초조하기까지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그저 아쉬움 아쉬움 또 아쉬움뿐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돌아올 때 느끼는 나에 대한 회의감,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아까움, 사람에 대한 실망감들이 뒤엉키는 그런 복잡한 기분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됐다. 방금 전 가버린 시간들을 촬영해 놓고 두고두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왔다. 



정작 그런 대화를 가능하게 했던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대화를 내가 좋아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했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짓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귀한 것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귀한 것인 줄 모르다가 다 사라지고 그제야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그 사람들을 다 멀리 보내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단지 그냥 사람이 고픈 줄로만 알고 한 참 버둥대다 보니 그저 사람이 그리운 게 아니라 그 사람, 그 대화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이제야 알게 된 일이고 그때는 그저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어찌하든 살고자 하는 본능은 있어서 알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그 사람들을 향해 가려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껴서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집에 오면서, 이대에서 왕십리까지 걸어오면서 그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땅을 툴툴 차며 걸었다. 그건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리움과는 다른 그리움이었다. 아쉬운 대로 전에 했던 수없이 많이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리려고 했다. 대화라는 것은 1회용 영사기 같은 것이어서 촤르륵 틀어 그의 우주를 엿보고 나면 다시 똑같이 재생될 수는 없었다. 겨우 겨우 한 장면 장면만을 떠올릴 뿐 무성영화처럼 정작 그때의 대화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답답해서 나는 표를 끊었다. 이유도 모르고 그저 답답해서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표를 끊었다. 말라카로 프놈펜으로 뉴욕으로 떠났다. 어떤 이에게는 연락도 닿지 않는데 메일 하나 보내고 가기도 했고 어떤 이는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어떤 곳에는 1달을 머물기도 했고 어떤 곳에서는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돌아가는 길에 그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살짝 웃을 수 있으면 그뿐.


아무 할 일도 없는 휴일 하루 종일 누워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고 해질 무렵쯤에야 책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다 차를 마실 때 그런 장면들이 자주 끼어들었다. 그런 장면들은 어쩌면 너무 사소한 일상에 가까운 것이어서 정작 그 장면의 당사자는 기억 못 할지도 모르고 그 당시 내가 쓴 일기에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유독 어느 시절에 자주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이상하게도 계절과도 그 사람과의 연락 여부도 지금 내 상황과도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자주 떠오른다. 한 때는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나에게 잘 도착했냐고 안부전화를 하던 그를 떠올렸고,  어느 계절에는 그녀의 방에 누워 이불을 깔고 뒹굴거리며 이야기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프놈펜의 늦은 밤 짐 정리를 하고 빨래를 널고 일기를 쓰며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 방으로 왔다. 그 날 그녀는 떠돌이 개에게 허벅지를 살짝 물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금방 쫓아내고 병원에 데려가 주어서 몸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자려고 누우니 자꾸 개가 달려들던 장면이 생각 나 약 기운에 몽롱한 와중에도 쉽게 잠들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형광등을 켜서 방을 환하게 밝히고 그녀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고 나는 그녀의 허벅지 께 베개를 베고 꿰맨 상처를 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대화한 내용인데 내용은 어림짐작만 할 뿐 거의 기억나지 않고 그 장면만 반복 재생된다. 


누군가 그리움이라는 단어 원형은 그리다였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시절과 그 사람이 그리워 계속 그 장면을 그리고 있나 보다. 나에게 그 장면은 후덥지근하고 어두운 밖과 달리 시원하고 환한 그 날 방 안처럼 온통 불안정한 세상 중에 그 방 안 만큼의 안정감이었다. 그녀에게도 그 순간이 조금은 편안할 수 있었기를 바라며 나 또한 그들의 장면에 간간히 등장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가 지나면 아마도 어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여권을 갱신할 것이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을 털어내러 가는 여행, 언젠가 차를 마시며 떠올릴 장면을 만들 여행들을 떠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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