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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Oct 18. 2018

기억 아카이브로 향하며

혼자 만든 우리 이야기  





친구와 술을 마시며 예전 일을 추억하다가 같이 겪은 사건을 두고 기억이 꽤 다르다는 걸 깨달은 밤이었어. 대략적인 맥락은 비슷했지만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대화나 풍경은 꽤 차이가 있더라. 서로의 기억으로 조금 메우긴 했지만 많은 대화와 풍경들이 흩어져 구멍이 나 버린 것 같았어. 돌아오는 길에 시원한 밤공기를 얼굴에 맞으며 문득 기억하고 싶은 순간, 기억될 순간을 그 당시에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 그랬다면 조금 더 그 순간을 온몸으로 기억하려 애썼을 테니. 하지만 시간 속을 지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지나가는 풍경들 중에 어떤 순간이 머릿속에 새겨질지,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지 알 수가 없지. 같은 풍경 속을 지나온 사람이 어떤 추억을 간직하게 될 지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고. 스스로도 알 수 없으니 타인의 기억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미리 선택할 수 없는 그것들은 내 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장소에서 촉발되고 한 번 인지한 뒤로는 계속 반복 재생돼. 내가 원할 때도, 제발 꺼져달라고 애원해도 계속 흘러나와. 그 영상의 주인공과의 인연이 끝나면 멈출 것 같지만 더 강력해져. 새로운 내용이 추가될 수 없으니 가지고 있는 필름만으로 계속 재생해. 시도 때도 없이 반복돼.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줄 너도 없으니 화면들은 내 마음대로 편집해서 끝없이 미화돼. 나이 들어가는 네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너는 더 아름다워지고 그 날의 날씨는 더 맑고 깨끗해져.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우리는 완벽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버려. 



나는 잠들 수 없는 밤이면 저 멀리 언덕 위에 지어둔 아카이브로 가.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아서 조금 깊고 먼 숲 속에 지어뒀지. 처음에는 흩어져 있던 기억들을 어찌할 줄 몰라 버거웠어. 무의식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엉겨오는 흔적들이 끝이 없었거든. 그 늪 같은 기억 속에 파묻혀 다시는 나오지 못할까 봐 그 숲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 두려워서 자주 가지 못했어. 술을 마셔야만 가끔 갈 수 있었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가도 결국 어느새 눈 떠보면 나는 침대 위에 내팽개쳐 있었어. 그걸 깨닫고 나서 나는 아주 한가한 어느 날 그 흔적들을 하나 둘 주워서 아카이브에 저장해 뒀어. 



나는 아카이브에 들어가 순서대로 필름을 꽂고 내 마음대로 편집한 우리의 이야기들을 재생해. 우리가 처음 데이트를 하다 앉아 있던 공원 의자로 가. 거기로 가면 언제든 우리가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지. 그곳에 있는 의자는 낡지도 않고 의자를 없애버리고 그 위에 나무를 심지도 않았고 내가 배치해둔 그대로 있어. 그곳의 우리는 울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헤어지지 않고 늘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 나는 우리 옆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봐. 그때의 상기된 내 얼굴과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그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저절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내리려고 괴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던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그저 미소 짓던 너를 봐. 나를 향해 아픈 표정을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던 너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너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나’ 챕터로 넘어가. 나는 말을 걸려던 입을 다물고 그런 우리를 바라봐.  


  이번에는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가고 있는 추운 밤의 강남역이야. 우리는 마주 서있지만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하지. 너는 고개를 숙이고 내 손을 바라보고 있어. 나는 너의 숙인 머리를 보며 화를 내고 있어. 네가 내 손을 잡던 순간 나는 네 손을 뿌리쳤고 너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지. 공원에 앉아 있던 너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슬픈 얼굴로. 마주한 시선에도 여전히 냉정한 표정인 나를 봐. 너를 울릴 작정인, 너에게 상처를 줄 작정인 그때의 나를 보며 그때의 너와 지금의 나는 같은 얼굴이 되지.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언제나 드라마는 똑같이 끝나. 처음부터 재생해도 중간부터 재생해도. 나는 혹시나 결말을 바꿀 수 있을까. 그 허상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때마다 나는 또다시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말아. 그러면 나는 너에게 묻고 싶어 져. 너는 어떤 기억을 재생하고 있냐고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냐고 내가 미처 기억 못 하는 건 혹시 없냐고 이 드라마에 더 추가할 것은 없냐고, 내가 이렇게 혼자 마음대로 우리의 기억들을 반복해도 되냐고 묻고 싶어 진다. 이렇게 반복하는 모든 영상들을 좀 더 잘 재생할 수 있게 그 날의 네가 입었던 옷 그날의 날씨 그날의 향 그날의 대화들을 내가 그 순간들을 미리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이 드라마를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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