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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29. 2018

뿌연 설탕으로 솜사탕 만드는 법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다

  



조금 조심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냥 초록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널 때 좌우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발을 딛는 정도. 공복에 술이나 커피를 마구마구 마시는 정도. 시시하지. 드라마 주인공처럼 울고불고 죽네 사네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은 그러지는 않더라. 소심하게 조금 막살고 생활에 약간 번거로움이 있는 정도였어. 무언가를 하려고 움직일 때마다 뿌옇게 끼어드는 네 기억들 때문에. 


버스를 탈 때, 지하철을 기다릴 때, 자주 가던 카페를 지나며, 뼈다귀 해장국을 먹을 때, 길을 걷다 넘어질 뻔했을 때, 떡국을 끓여 먹을 때, 집 앞 공원 정자에 앉아 있을 때,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실 때, 가로수길 뒷골목을 지날 때, 삼청동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서, 장범준 2집을 들을 때, 도서관에서 책 빌릴 때, 우비를 쓰고 뛰어가는 사람을 볼 때, 여행 갔다 공항에 도착할 때, 알약 삼킬 때, 2호선의 연달아 있는 을지로역들을 지날 때, 스쿠터를 타고 가는 연인을 볼 때.


너무 자주 끼어들어서 나중에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지. 그래서 처음에는 하지 말라는 것 하는 삐뚤어진 느낌이었는데 나중에는 뿌연 가루들에 멍하다가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많아지더라. 가령은 바로 앞에서 오는 자전거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칼질을 하다가 손톱에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거나. 걱정할 건 없어. 내가 나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데. 아직 손을 진짜 벤 적도 없고 자전거에 진짜 부딪힌 적도 없으니까. 



얼마 전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봄에 대해 글을 쓰려면 봄에 대한 기억을 쓰면 되고 사랑에 대해 글을 쓰려면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에 대해 쓰면 된대. 그래서 그를 사랑한 걸 알려면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면 된다는 내용이 나오더라. 갑자기 뿌연 설탕들이 빙빙 돌면서 가는 실이 되었다가 폭신한 솜사탕이 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기억들이 피어났어. 어디선가 갑자기 달콤한 향도 나는 것 같았어. 솜사탕이 너무 커질까 봐 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털면서 다시 책에 열심히 집중하려 했지. 


 날씨가 어느 하나 흠잡을 것 없이 너무도 좋은 어느 날 나는 집 앞 공원에 나가 돗자리를 깔고 누웠어. 그 날 하늘은 구름이 단 하나도 없었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봐도 하나도 없고 짙은 푸른색부터 저 멀리 옅다 못해 하얗게 보이는 색까지 깨끗하게 칠해져 있었어. 아무것도 없어서 점프하면 우주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어느 부분을 톡 건드리면 저 먼 까만 우주까지 다 쏟아져 내릴 것 같기도 한 하늘이었어. 그런 하늘이라면 큰 솜사탕 몇 개쯤 띄워도 괜찮을 것 같아서 네 기억을 한 숟갈 씩 넣어서 솜사탕을 만들어 하늘에 하나씩 띄워 보냈지.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에는 솜사탕이 가득 차 있더라구. 그 많은 솜사탕들이 어디서 다 왔는지 모르겠어. 내 안에 저렇게 많은 설탕들이 있었다니! 아아 나도 알아. 적은 양의 설탕으로도 큰 솜사탕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안 그래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까 꼭 손 뻗어 잡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당장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어. 그랬더니 슬며시 사라져 버리더라. 그래서 손을 거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어. 그것 또한 그대로 괜찮던 걸? 


아마도 난 내가 너를 미워하게 될까 무서워 네 기억들을 뿌연 채로 두려고 했었나 봐. 그런데 막상 꺼내서 하늘에 펼쳐 보니 꽤 괜찮더라. 솜사탕을 만들 재료를 줘서 고마워. 하늘에 구름이 진짜 하나도 없어서 너무 햇빛이 쩅한 날 가끔 한 두 개씩 만들어 하늘에 띄울까 봐. 너도 어느 날 하늘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솜사탕을 발견한다면 그건 다 내가 만든 거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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