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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r 22. 2019

봄일까 겨울일까

짧은 꽃샘추위를 지나던 




소녀와 소년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어. 소녀가 학교 가는 길에 소년의 집이 있었지. 매일 소녀의 등교 길에 소년의 집이 보일 때쯤 소년은 집 대문을 나서고 있었어. 소녀는 장난꾸러기였어. 소년을 따라가며 놀리곤 했지. 머리 깎았니? 까실 까실한 게 재밌다. 3반에 누가 너 좋아한대. 너도 좋아하지? 너 혼자 사탕 먹냐. 나두 줘. 매일매일 말을 걸며 히히 웃었어. 소년은 늘 그저 얼굴을 붉히며 고개 숙이고 한 발 앞서 걸어가기만 했지.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또 웃으며 말했지. 부끄럼 탄대요.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매일 같이 학교를 다녔어. 


아직은 쌀쌀해서 겉옷을 꼭 챙겨 입어야 하는 봄날 소녀와 소년은 처음으로 교복을 입게 되었어. 귀밑 똑 단발을 한 날 소녀는 조금 자랐던 걸까? 교복을 입은 소년을 봤을 때 소녀는 더 이상 소년을 놀릴 수 없었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어. 같은 반이 되었지만 소녀와 소년은 한 달이 넘도록 아는 척도 하지 않았어. 그저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볼 뿐이었어. 어느덧 교복만 입고 다녀도 포근해진 어느 날 학교 축제가 열렸고 소녀와 소년이 학급대표로 퀴즈대회에 나가게 됐어. 반 친구들은 소년과 소녀를 놀려댔고 둘은 고개를 푹 숙이고 퀴즈대회가 열리는 교실로 나란히 걸어갔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교생이 참가하는 퀴즈여서 1학년 학생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소녀는 금방 탈락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지. 



반별로 하나의 정답을 스케치북에 적어내는 방식이라 둘은 스케치북을 둘러싸고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서로 답을 상의해야 하니 말을 걸 수밖에. 소년이 소녀에게 그렇게 길게 말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정답을 상의하며 소년은 스케치북에 조그맣게 글을 적었고 소녀는 글 쓰는 소년의 손을 열심히 지켜봤지. 소녀도 대답을 스케치북에 사각사각 써 내려갔고 소년은 글을 쓰는 소녀의 팔과 목을 바라봤어. 빨리 탈락하고 오겠다던 계획과 달리 소년과 소녀는 계속 살아남았어. 늘 고개를 푹 숙이고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던 소년이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지. 하이파이브까지 했다니까. 소녀와 소년의 의자는 점점 가까워졌어. 그리고 둘의 심장도 점점 두근거렸지. 아마 우승에 점점 가까워져서 그랬겠지. 아마?


정답이 하나 둘 맞아 점점 등수가 올라가니 쑥스러웠던 10분 전은 기억도 나지 않았나 봐. 평소에 묻고 싶었던 이야기들까지 하게 됐지. 소녀는 소년에게 왜 손수건을 쥐고 있냐고 물었고 소년은 긴장하면 손바닥에 땀이 많이 나서 어머니께서 늘 챙겨주신다고 말했지. 소녀는 소년이 평소 시험답안을 쓸 때 손바닥 밑에 손수건을 받치는 걸 봤거든. 하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지. 소년은 소녀에게 시험공부를 독서실에서 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소녀는 독서실을 가봤는데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공부가 안 되더라고 말했지. 소년은 소녀의 친구들이 다니는 독서실에서 혹시 소녀가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지 늘 두리번거리곤 했거든. 하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지. 


3팀까지 남았을 때 소녀와 소년은 탈락했고 선생님의 칭찬과 문화상품권 1장씩을 받아서 교실로 향했어. 짧게만 느껴졌던 시간은 2시간이나 지나있었어. 그래서 소년과 소녀가 어떻게 됐냐고? 둘이는 다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이로 돌아갔어.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소녀는 손수건을 챙겨 다니게 됐고 소년은 독서실에 가서 괜스레 두리번거리지 않게 됐지. 


이제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을 소녀와 소년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 마음도 잘 몰라 너의 마음은 더 알 수 없던 그때. 

봄인가 하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며 눈이 내리고 

아직 겨울인가 하면 어느새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가득한 봄날 같았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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