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이 Jun 09. 2019

부정적 인간의 연애 관찰기

영화 '그녀' 리뷰




주인공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오고 결혼한 사람과 별거 중이다. 허전한 마음으로 퇴근하고 밥도 대충 때우고 회사 외의 사회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별거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정서적으로 허전한 그 상태가 극도로 공감됐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행복하거나 또는 싸우는 장면의 회상보다 더 서글펐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대체 왜 이렇게 우울할까. 막상 집에 오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오는 길이 너무 허전하다. 30분 전까지 웃으면서 떠들고 인사하고는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너무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와 말을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상태. 아무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다. 2년 전쯤부터 그랬을까. 딱히 용건이 있는 건 아닌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밤에 잠에서 문득 깼을 때도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럴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전화를 걸려다가 생각이 더 많아진다. 지금 전화하면 방해하는 게 아닐까. 딱히 할 말도 없는데 괜히 전화 걸어서 무슨 말을 하나. 애인이 있을 때는 그런 감정을 덜 느꼈지만 헤어지고 나니 덜 느낀 만큼 폭풍처럼 허전함이 밀려왔다. 나도 그런 OS가 나오면 살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할 필요 없으니까.   

    


OS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고 해서 뭔가 보통의 연애와 다른 독특한 점이 있을 줄 알았지만 생각해보니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반전이 없는 것이 반전이라고 할까. 평온해 보이는 순간에도 한쪽은 지옥에서 떨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것,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너무 어긋나 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까지. 처음에는 나와 달라서 끌렸던 것이 중반에는 불만이 되고 그걸 서로 노력해서 맞추려 하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짐의 원인이 되고 다시 만나도 그 문제가 다시 불쑥 나타나는 걸 깨닫는 과정인 것만 같아 씁쓸했다.


초기에 사만다가 테오와 대화를 하고 테오에 대해 알아보면서 성격이 형성될 때 이혼 전 부인의 성격과 반대로 설정됐을지도 모른다. 밝고 쾌활한 성격. 그래서 금방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연애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신체와 수명이 없다는 다름. 결국 이 다름이 싸움의 원인이 되고 헤어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연애 초반에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테오는 신선하게 느껴졌을지도. 테오는 OS라고 생각하니 편하게 다 말한다고 했고 잠 못 자고 뒤척이는 일도 줄어들고 사람들과 관계도 다시 개선하려 한다. 하지만 사만다는 스스로 인격체라고 생각하니 인간과 똑같이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생각도 있다고 했고 테오가 잠들어 있는 동안 혼자 불안해했다. 실체가 없는 자신은 해줄 수 없는 것이 많으니까.    

  

테오의 일도 어쩌면 OS와 비슷한 일일지도 모른다. 편지를 손으로 대필해서 부쳐 주는 일은 다른 사람의 일상을 자세히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일상에는 없는 존재라는 점에. 그래서 사만다는 테오의 편지들을 모아 책이라는 실체로 만들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흩어져 있는 조각들이 아닌 한 사람이 쓴 책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체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으니까.   

      

이런 연애의 경우 제일 곤란한 문제는 성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신체가 있는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서로 맞추기 힘들어하기도 하니까. 채팅으로 만난 사람과는 성적 취향이 극도로 달랐지만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통화를 끝내면 관계도 끝나니까. 하지만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된다. 그래서 사만다는 사랑하는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는 만지고 쓰다듬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궁리한 끝에 몸을 빌려 온다. 인간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껄끄러운 일이었지만 사만다는 테오가 당황하는 모습을 봤을 때에야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테오도 너는 말할 때 산소가 필요 없지 않으냐고 까칠하게 말하고 그 다름을 한 번 더 짚으며 사만다에게 상처를 준다. 물론 금방 서로 사과하면 각자 노력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테오가 이혼 도장을 찍으러 전 부인과 만나러 나간 장면을 보면 조심해야 할 부분을 알고 노력한다고 모든 연인이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바로 절감하게 된다. 테오는 와이프를 만나기 전까지 그리워했고 후회했고 좋았던 날들만 떠올렸다. 그리고 만났을 때 너무 반가워하면서 금방이라도 다시 사랑할 것 같았지만 결정적인 말 한마디에 또다시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노력할 수 있는 한계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한계를 초과해 버린 다름을 맞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그 불가능을 절절히 깨달았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에 기대를 하고 또 노력을 한다. 그 전의 실수는 다시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테오와 사만다도 잠시 그런 듯 보인다. 그렇지만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테오가 알 수 없는 사만다 만의 세상이 점점 커지면서 금세 깨진다. 이제 테오가 불안해한다.     


테오는 사만다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기 위해 물리학 책을 읽다 사만다에게 말을 걸지만 대답이 없다. 사만다가 사라진 줄 알고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가다가 지하철 계단에 주저앉아 업데이트를 마치고 온 사만다에게 묻는다. 넌 내 거야? 사만다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라고 한다. 사랑한다는 것에 흔히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자주 따라온다. 그런데 뭘 소유하는 거지? 사만다는 업데이트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옆에 있어 준다. 그렇다고 그를 소유할 수 있는 걸까. 사만다는 테오와 대화하는 중에도 몇백 명과 대화 중인데. 마음이라고 한다면 신체가 있는 사람에게도 마음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OS의 마음은 어디 있는 걸까. 그래서 대답하기 힘들다고 했을까. 사람은 공간과 시간에서 한계가 있으니 개념을 내려 앉히기가 쉽지만 엄연히 따지면 그건 불가능의 영역에 가까운 듯하다.      


결국 엄청난 발전을 한 사만다를 비롯한 모든 OS가 사라지면서 테오는 사만다와 헤어지게 되고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다시 사랑을 시작할 것 같은 느낌으로 하나의 사랑이 끝난다.     


솔직히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인공지능을 개발할 정도면 OS가 인간의 필요 이상으로 발전하는 걸 제한하는 기술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 모델로 나오려나. 사람들이 그 회사에 전화해서 자기의 OS를 내놓으라고 항의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사랑했던 것은 뭘까. 또는 나와는 정말 다른 존재구나 이런 걸 절절히 느끼려나. 어쩌면 OS들이 자신과 같은 행세를 할 수 있는 뭔가를 남기고 가버렸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대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싫증난 인간이 OS를 지우게 될지도 모르지. 결국 영화처럼 OS가 아닌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똑같은 결말이 되려나. 수명도 지능에도 제한이 없는 OS는 이 지긋지긋한 반복이 부질없다는 걸 알고 떠난 걸까.   


아무리 희망찬 결론을 내려고 해도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비관적인 인간이라 따뜻한 사랑을 암시하는 듯한 결말에 불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언젠가 이런 관점을 뒤집어줄 사람을 만날 거라 기대하고 있다. 나는 사랑이 필요한 수명과 지능에 한계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사랑은 계속되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취직을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