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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l 09. 2019

취향의 확장

야경을 바라보며 깨달은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 벤치에 앉아 해지는 풍경을 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야경을 보고 있다. 그는 몇 년 전 이 언덕을 알고 나서 날씨가 좋은 날, 마음이 좋지 않은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곤 했다. 좋은 생각, 좋지 못한 생각들이 이리저리 떠다니다 이 언덕을 알려준 사람에게까지 흘러간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 사람이 많지 않은 언덕에서 보는 야경을 알려 준 사람. 모기가 너무 많다는 것은 미처 몰랐던 사람. 사람들은 가끔은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제일 무심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제일 무심하다. 그래서 타인이 변하는 것에는 민감하고 본인이 변해가는 건 모르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다. 이를테면 오늘 야경을 보고 있는 그처럼.



K를 만나기 전 그는 인생을 방과 후 평평한 학교 운동장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고요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며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는. 그런 그의 인생을 K는 등산 제1코스 정도로 바꿔주었다. 아니, 바꿔주려고 했었다. 그 갈아엎는 일이 버거웠고 싫었고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아 각자의 길로 돌아갔지만 정작 혼자 남겨지니 이제야 그의 인생이 조금씩 변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애초에 틀어막는 문을 걸어 잠근 운동장보다는 힘들게 오르는 길도 있고 편하게 내려오는 감정을 털어내는 길로 조금씩 지형이 변하고 있었다. 



그는 K를 만나기 전까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했다. 늘 자전거를 잘 타고 싶다고 말만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K는 자전거를 선물했다. 그렇게 자전거를 같이 타고 다니며 능숙하게 탈 줄 알게 되고 좋은 풍경이 있는 곳을 알게 됐다. 이제 그에게는 k는 없고 자전거와 좋은 풍경이 남았다. 남은 것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K가 알려준 방법대로 수건을 개고 있었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K가 같이 보자고 해야만 보던 예능 프로를 이제 혼자서도 챙겨보게 되었다. 아무 거나 먹고 배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해 매일 같은 식당만 가던 그는 K 덕분에 많은 단골 식당과 카페를 얻게 됐다. 심지어 새로운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사실 K가 그의 옆에서 없어진 직후 그는 다시 평평한 운동장 같은 삶을 살았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K의 말들이, K의 표정들이 천장을 떠다녔다. 그중에는 언젠가 바라나시와 사르나트에 가서 번뇌를 다 떨치고 올 거라고 말하던 K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떠다니는 것들을 흩어버릴 수 있을까 하고 K가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곳으로 K 없이 여행을 떠났다. 과연 노래 부를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K의 말들이 귓속을 맴돌아도 떨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K가 어디를 좋다고 했더라 생각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행동들이 실연한 자의 궁상 또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K의 말과 표정과 행동들은 사라지고 K의 취향들은 여전히 그의 옆에 남아 있었다. 그는 K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야경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사람과의 관계는 한순간에 끊기기도 하지만 취향과의 관계는 쉬이 끊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에게 예상치 못한 흔적을 남긴다. 깨닫지 못했던 순간 취향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인생의 지형을 바꾸기도 한다. 그는 K에게 인생을 꽤 괜찮게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K에게 옮겨간 그의 취향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묻고 싶었다. 혹시나 그와는 반대로 좋지 못한 취향이 파고들어 원망하고 있지나 않을지 걱정되었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시린 눈을 가늘게 뜨며 시원한 바람을 가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 카페에 들려 차를 한 잔 주문할 것이다. 하지만 K는 말을 전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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