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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17. 2019

마땅하지 않은 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조금 늦은 밤. 아주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최근 독립해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밤마다 왠지 모르게 허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번갈아가면서 안부전화 중이라고 했다. 혼자 살더라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화 상대를 찾으려 하는 모양이다. 


본가에 살던 어린 나를 떠올린다. 어쩌다 집에 잠깐씩 혼자 있으면 속으로 꽤 설레어했었던 기억이 난다. 딱히 무슨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워서 숨만 쉬고 있어도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대학부터는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고등학교 때 이미 확고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가서 사는 게 곧 혼자 사는 걸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기숙사와 하숙 그리고 고시원을 번갈아가며 살고 나서야 마침내 진짜 혼자 사는 내 공간을 얻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도 6~7년이니 적응이 꽤 되었고 이젠 정말 다른 사람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내가 원할 때 불을 켜고 끄고 집을 나가고 들어오니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동안은 정말 그랬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물론 집순이라 지금도 때때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원하던 것이 이뤄져도 더 원하는 것이 생기는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뭔지 알 수도 없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가족을 떠나 사는 것이었다면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전화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새삼 환경에 아무 변화도 없고 용건도 없는데 전화를 걸어 오늘 날씨가 참 좋았더라고 점심이 진짜 맛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게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걸 조금 빨리 알았다면 이 생각들을 조금 따뜻하게 대했을지도. 그때 나는 내가 새삼 한심했다. 그렇게 혼자 살기를 오랫동안 바랐으면서 뭐 그렇게 하고픈 말이 많아서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고 싶은지.

 

그래서인지 막상 전화를 거는 일은 열에 한 번 정도일까. 짜증 나는 상사 욕을 하고 싶어도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전후 사정 설명하는데 30분은 써야 할 것 같아 안 하거나, 지금 이 시간에는 애인과 있을 텐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고, 전화하면 무슨 일 있냐고 너무 걱정할까 안 하고 이런 무수한 핑계를 다 지나고도 상대를 찾는 일에 지치지 않으면 전화를 걸게 된다. 아마 내가 그런 것처럼 친구들도 내게 전화가 오면 언제든 반가워하겠지만 이상하게도 통화버튼을 누를 때는 끝내 망설이게 된다. 


 

남자 친구가 있을 때는 이런 생각들이 잠시 없어지기도 한다. 사소한 이야기를 할 상대를 찾지 않아도 되니까. 꽤 오랜만에 연애를 시작했을 때 친구가 물었다. 오랜만에 연애를 하니 좋은 점이 뭐냐고. 끼니를 잘 챙겨 먹는지 잠은 잘 잤는지 매일 확인해주는 점이 좋은 것 같다고 하니 친구는 웃으면서 무슨 독거노인 같다고 했다. 독거는 맞고 아직 노인까지는 아니니까 청년이라고 할까. 독거청년도 그런 챙김을 필요로 하는지 독거청년조차도 몰랐던 것 같다. 잠시 잠잠했던 그 생각들은 헤어지고 나면 미친 듯이 밀려와 마음은 더 헛헛해진다. 



희한하게도 누군가에게 전화 걸고 싶은 병은 야근하고 퇴근할 때나 조용한 밤에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젠 혼자 산지도 나름 꽤 오래되어 이런 감정쯤은 쿨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가도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볍게 이야기하고 털어버릴 것들이 쌓이고 쌓여 혼자 곱씹고 잊어버리자고 애쓰면 더 끈질기게 들러붙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빨래를 너는 동안, 잠들려고 누웠을 때 머릿속에 맴돈다.    


선배로서 새내기 독거청년인 친구에게 이 감정에 잘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지만 잘 모르겠다. 가끔 소식이 궁금하고 민폐 끼치지 않을 만한 이를 찾아서 전화를 할 수밖에. 그리고 같은 처지의 외로운 이에게 전화가 오면 반갑게 받아 줄 것. 그것마저도 마땅하지 않은 밤에는 그저 가만히 누워 조금씩 사그라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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