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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09. 2019

들어야 할 말, 듣고 싶던 말-下

L의 이야기




-어디야? 알바 끝났어?

K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L이 임용 준비를 하고 있어서 급한 일이 아니면 K는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L이 시간 날 때 연락하기로 했다. 

-응. 친구랑 술 한 잔 하러 가는 중.

L은 왜인지 모르게 K가 없는 약속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끝나고 너네 집 쪽으로 갈게. 잠깐 보자.     

L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아니라고 다음에 보자고 보낼까 하다 다시 폰을 내려놓았다. 책으로 시선을 내리려고 애써 보아도 자꾸 눈앞의 허공만 보게 되었다. 지금 L은 아침에 집에서 나오며 엄마와 다툼했던 장면을 보고 있다. 늘 다툼의 시작은 K로 시작해서 돈 문제로 끝난다. 엄마는 K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보라고 선자리가 꽤 자주 들어온다고 했다. 언제까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시험에 매달릴 거냐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공부도 더 잘 될 거라고 했다. L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     

“엄마가 그 말을 해? 안정? 안정적인 환경 찾아 줄 생각을 하지 말고 집이 안정적인 환경이면 되잖아. 내가 돈 벌어서 공부하고 지금 엄마 입 속에 있는 그 밥도 내가 번 돈으로 산거잖아. 근데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부모가 이런 말도 못 해? 얘가 어디서 소리를 질러?”

“지겹지도 않아? 그 말 꺼낼 때마다 소리 지르는데 계속 말하는 이유가 뭔데? 부모라면 공부에만 신경 쓰라고 다 지원해주지. 이렇게 사사건건 시비 걸고 딴지 놓는 게 아니라. 같이 공부하는 애들 중에 나 같은 애들이 있는 줄 알아? 단 한 명도 없어.”

“다 컸는데 자기가 돈 벌어 자기 하고 싶은 것 해야지. 걔들이 잘 못 된 거고 네가 맞는 건데 왜 생색이야.”

“언제 가만 뒀는데 생색낸 적 있어? 아무 말 안 하잖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데  자꾸 나한테 왜 이래라저래라 하냐고.”

“어휴 알았어. 알았어.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네.”     


L은 밥은 반도 채 먹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L은 하루에 과외를 2개씩 하고 있다. 교재비에 조금 보탤까 해서 임용 합격한 선배가 하던 과외를 하나 받았던 것이 하나 둘 늘어나 이제는 하루에 두 개씩 하게 되었다. 돈은 꽤 여유 있게 벌게 됐지만 공부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냥 과외를 계속하길 바라는 눈치였고 학자금 대출도 돈 있을 때 갚자는 생각에 계속 유지하다 보니 어느새 어영부영 4년째 공부 중이었다. L이 보는 원인은 과외 개수가 너무 많아서 인데 엄마가 보는 원인은 K 때문인 모양이다. 죽도록 참을 때는 답답해서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다가 미치게 퍼부으면 그래도 엄마에게 너무 했나, 내 상황이 지금 이러지 않았으면 속상할 일이 없었을 텐데 스스로를 탓하며 초라해진다. 처음에는 K에게 하소연하듯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결국 같은 얘기였다. 엄마가 매일 하는 잔소리만큼 지겨운 답도 없는 이야기들. 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한 게 아니라 그래서 뭐 대책도 없잖아. 이런 마음이 드는 이야기들. 결국은 뭔가가 되어야만 끝나는 이야기들. 어느 날 K가 그냥 회사 다니는 사람이면 어땠을까. 갑자기 그 생각이 든 후로 듣던 K마저 답답해질 것 같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지 꽤 됐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K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겠구나. K는 결혼식장에서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언젠가 K가 깨방정을 떨며 구경하라고 해서 가서 본 적이 있었다. 연극하는 것도 자주 보러 갔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보러 갔다가 L은 알 수 없는 초라함을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K는 왜 보러 오라고 한 걸까? 궁금했지만 물을 순 없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 어색하게 서 있던 L을 향해 K가 웃으며 살짝 뛰어왔다. 

“어때? 여기 예쁘지? 우리 나중에 여기서 결혼하면 좋겠지? 미리 와서 확인 한 번 해 보라고 오라고 한 거야.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축가는 내가 할 거야. 히히. 아니면 같이 할까?”

어색한 표정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K는 L에게 호들갑으로 웃음을 주었다. 한 순간도 웃을 일 없던 L을 K는 늘 웃게 했다. 처음에는 그게 좋았다. 공부하다 스트레스 때문에 짜증이 나다가도 K가 한 말을 떠올리면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걔 진짜 성격 좋다. 걔도 어떻게 보면 우리랑 비슷한 상황이잖아. 어쩌면 더 힘든 상황 아니야? 나도 그런 사람 만나고 싶다야.”

그 말을 듣고 나니 L은 의문이 들었다. K를 마냥 내가 편한 대로만 봤던 건 아닌가. K네 집은 우리 집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원래 밝은 애라는 이유로 K의 힘든 순간들은 보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닌지. 그 생각이 든 후로는 K를 배려해 보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그 노력이 L의 힘든 순간들을 가리는데 쓰였다. 웃게 해 줄 수 없지만 짐이라도 되지 말자는 생각에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려 처음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 진짜 오늘 공부 안되네.’

기분은 엉망진창인데 그 와중에 배는 고팠다.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메뉴를 보니 마땅히 먹고 싶은 건 또 없었다. 라면을 먹고 있는데 과외하는 학생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전화 괜찮아요?”

“네. 무슨 일이세요?”

“아니. 우리 애가 친구한테 선생님 만나고 성적 엄청 올랐다고 자랑을 했더니 그 엄마가 선생님 소개 좀 시켜 달라 그래서.”

“아 지금 평일에는 시간이 다 차 있는데......”

“그래요? 내가 안 그래도 선생님 시간 안 될지도 모른다고 하긴 했는데.”

“토요일도 괜찮다고 하시면......”

“내가 한 번 말해보고 나중에 수업 오면 알려줄게요. 좀 있다 봐요.”     

갑자기 라면이 너무 짜게 느껴져 젓가락을 내려놨다. 속이 답답하다 못해 뜨거워서 건물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L은 문득 자신이 외나무다리 가운데에 서서 이리도 가지 못하고 저리도 가지 못한 채 떨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과외가 들어오면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그렇다고 안 된다고 거부도 하지 못하고. K에게도 마찬가지다. K도 힘들겠지 언젠가 같이 잘 되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려 하지만 자꾸만 의지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다. K에게 현실적인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만나면 말장난하고 웃는다. 꺼내봤자 답답해질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려 해도 전혀 들어오지 않아 K와 나눈 메시지 대화를 읽었다. 언젠가부터 형식적인 대화뿐이었다. 문득 K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어느 한 방향으로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곳에 서서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갑자기 묻고 싶어 졌다. 꽤 오랜 시간 외면한 우리의 감정들. 

     


-너희 집 근처에 있어. 오면 연락해.     

메시지 도착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전쯤이었다. L은 한발 먼저 배려하는 듯한 K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분명 처음에는 다 좋았던 것들인데 신기하리만치 정반대의 감정이 느껴졌다. 대체 두 시간 동안 우리 집 근처에서 뭘 하고 있을까? 전화를 거니 근처 편의점이라고 했다. L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눈부시게 밝은 편의점 간판 아래 작은 콩알 하나처럼 웅크린 K가 보였다. L은 걸음을 멈추고 콩알 같은 K를 바라봤다. L은 언제부터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L은 또 짜증을 느꼈다. 사실 짜증이 아니라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반사작용이었다. 울어 봤자 답도 없는데 왜 우느냐고 스스로에게 계속 짜증을 냈더니 이제는 울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기도 전에 짜증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다. 마침내 L은 울지 않기에 성공한 걸까.


 L의 걸음이 K 앞에 멈췄다. K는 고개를 들어 L을 바라봤다.      

“왔어? 오늘도 고생이 많았네. 앉아.”     

K는 환하게 웃는다. L은 그 미소에 한 번 더 짜증을 느꼈다. 최근 L은 몇 번이나 헤어지자고 말을 하려 했었다. 그때마다 그 해맑은 얼굴에 웃음이 먼저 쏟아져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몇 번이나 시도하지 못했던 그 말을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어지자. 숨 막혀. 너도 가짜. 나도 가짜. 둘 중에 하나라도 진짜면 얼마나 좋아?”     

K의 시선이 땅으로 다시 떨어졌다. K는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L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L의 짜증을 뜯어내고 눈물이 흘렀다. 

“너도 지칠 거 아니야? 네 결과만 신경 쓰고 네 것에만 슬펐다 기뻤다 해도 벅찬데 내 감정까지 받아야 하니 얼마나 버겁냐고! 아니야? 우린 잘 못 만났어. 서로한테 하등 도움도 안 되잖아.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네가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잖아. 너한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K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다. 아무 반응도 없는 모습에 L은 저도 모르게 점점 악을 쓰게 됐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차라리 욕이라도 하라고! 이제 긍정적인 척도 지쳤다. 우리가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 언제? 대체 무슨 수로? 평생 이렇게 살 거 뻔 한데 아닌 척 희망고문이나 하고 있잖아. 욕이라도 해! 왜 아무 말이 없어. 이것 봐. 지금 바닥을 치면서도 서로를 더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 이게 할 짓이야?”      

어쩌면 홧김에 한 말이었지만 얼마나 자주 반복해서 생각했는지 정리된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결국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늘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지금 K가 아무 말이 없는 것도 역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항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K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할 말 없어? 이제 끝이라고. 혹시나 잘 돼서 티비에 나와서 내 욕을 해도 후회하지 말라고 그 딴 헛된 상상이나 하면서 실실 쪼개는 짓 이제 그만 할 거라고.”      

눈물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목이 막혀서 L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나도 힘들었다고 마찬가지라고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하지만 K는 여전히 땅만 보고 있다.     

“진짜 다 끝나긴 했나 보다. 너 만나면 혹시나 내 마음이 바뀔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네. 잘 지내.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     


L은 돌아서 걸으며 생각했다. 아침에 엄마와 싸우지 않았으면 이런 말들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과외가 하나 더 들어오지 않았으면, 라면이 짜지 않았으면, K가 우리 집 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K가 웃지 않았으면 이런 말들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다만 조금 앞당겨진 것일 뿐. 1인분만큼의 절망만 감당하는 것이 서로에게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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