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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07. 2019

들어야 할 말, 듣고 싶던 말 - 上

K의 이야기




“신랑 신부 입장!”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주인공 두 사람이 입장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조명은 전부 꺼지고 버진로드만 환하다. K는 잘 보이지 않는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살짝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어두운 거 아니야? 그래도 나도 행사에 필요한 사람인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그냥 이건 돈을 버는 일이다. 내가 설 진짜 무대는 따로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그렇게 위로를 했던 시기도 이제 지났다. 그런 기회가 어쩌면 내 인생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면서 몸서리가 쳐지는 순간이 더 잦아졌다. 하지만 웃는 게 좋다. 이 일이라도 계속하려면. 이번 달에는 아르바이트를 몇 개 못해서 L의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 줬다. 

“신부 친구들이 축가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동 소녀시대의 무대! 제목은- ”

사회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주가 시작된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만 사회자는 무안해졌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하객들을 둘러본다. 하객들은 그저 환호하며 반대편의 축가 준비하는 신부 친구들을 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K는 시선을 거두던 사회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표정에 더 멋쩍어진 K는 허공을 바라보다 축가 반주에 맞춰 박수를 치며 시선을 다시 신랑 신부에게로 옮겼다. K는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입장, 퇴장할 때 파트너와 노래를 부른다. 지인들의 축가가 끝나고 K의 대사에 맞춰 음악이 흐르면 파트너와 듀엣곡을 부르며 사람들에게 장미꽃을 나눠 준다. 언제나 하객들은 처음 반주가 흘러나오면 대체 누가 노래를 부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노래 부르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면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에이. 진짠 줄 알았네.”

K 옆쪽의 하객이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을 했다. K는 그에게도 장미꽃을 한 송이 준다.      


일련의 과정들이 다 끝나고 사진 찍기 전에 K와 동료는 신랑 신부에게 인사를 한다. 늘 같은 대사로 활짝 웃으며 축하드린다고. 거기까지가 이 일의 끝이다. 언젠가 K는 오디션 탈락 통지를 받은 날 인사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귀가했다가 담당자에게 엄청난 꾸중을 들었다. 일을 왜 이렇게 가식적으로 하느냐 좋은 날 왜 초를 치느냐고. K는 그 뒤로 결혼식장에서 나와 지하철을 탈 때까지 호빵맨 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그러기가 조금 버거워지는 날이었다. K는 짐을 챙기는 동료에게 다가갔다.

“야 술 한 잔 할래?”

“대낮부터 뭔 술이야. 내일 2차 오디션인데 술 마시게?”

“아 그거 연락 왔어?”

“너 연락 못 받았냐. 난 당연히 됐을 줄 알고. 미안.”

“미안은 뭔 미안이야. 내가 춤이 안 되잖아. 기대도 안 했어. 그럼 다음에 마시자. 잘 되면 한 턱 쏴!”

“붙어 봤자 병사 37번인데 뭘 쏴.”

“그래도 쏴. 내일 잘하고 다음에 보자.”    

       


-어디야? 알바 끝났어?

L에게 메시지가 왔다. L은 임용 준비를 하고 있어서 급한 일이 아니면 되도록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L이 공부하다 쉴 때 연락하기로 했다. 

-응. 친구랑 술 한 잔 하러 가는 중.

이런 기분으로 L을 만나면 안 될 것 같아 K는 있지도 않은 약속을 만들어냈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끝나고 너네 집 쪽으로 갈게. 잠깐 보자.     

K는 예상 못 한 답을 받고 멈칫했다. 보통 L은 약속이 있다고 하면 그 날은 보자고 하지 않았는데. L도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아. 오늘은 진짜 힘든데......'

내려야 할 정거장은 벌써 3개나 지났다. K는 언제나 자신 있었다. L을 웃게 만드는 것과 그리고 언젠가 유명한 배우가 될 거라는 것. 그 두 가지가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었다. 한 가지에 자신이 점점 없어져가면서 나머지 하나도 없어져갔다. 결혼식장에 있으니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면서 더 초라해져 갔다. L은 무슨 감정일까 묻고 싶지만 두려워졌다. 네 꿈은 허황된 거라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정신 차리라고. 의지가 되는 게 아니라 짐이라고. 네가 없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나 좀 그만 힘들게 하라고. 그런 말들을 쏟아낼까 봐.


 L이 진짜 선생님 됐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까? 무심결에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떨어뜨리기 위해 K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지. 진짜 선생님이라니 L이 가짜란 말인가. L은 이미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버는 과외 선생님인데. 아무리 도리질을 세차게 해도 한 번 들러붙은 생각들은 떨어지지 않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두 정거장을 더 지나 내린 L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저 만나러 가는 길도 좋았다. 당장 손에 닿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걸으면 금방 L의 앞에 도착했다. 꿈속을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몇 년이나 같은 상상을 하며 그 상상이 닳고 닳아 초라해져 이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 걸 떠올려 본 적은 당연히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인생은 그토록 바라고 닳도록 상상한 곳이 아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걸까? 


“배고프다.”

눈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컵라면과 맥주를 사서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았다. 결혼식이 많은 계절답게 해가 져도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L은 과외 중일 텐데 중얼거리며 폰을 보니 엑스트라 알바하러 오라는 문자였다. 

“에이 씨......”

딱히 기다리던 연락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K는 심통이 나서 욕을 중얼거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혹시 L과 엇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L의 집 근처에 와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K의 입은 L 앞에 서 있는 것 마냥 어색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땅바닥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 K 뒤로 L이 서 있었다. 

"왔어? 오늘도 고생이 많았네. 앉아.”

K는 손으로 의자를 토닥이며 말했다. L는 앉지도 않고 K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헤어지자. 숨 막혀. 너도 가짜. 나도 가짜. 둘 중에 하나라도 진짜면 얼마나 좋아?”     

갑작스러운 L의 말에 L에게 문자를 보낼 때처럼 미소를 띠고 있던 K는 땅으로 고개를 떨궜다.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L도 진짜 가짜 얘기를 하네 생각했다. 가끔 오늘처럼 초라해지는 날 K는 상상하곤 했다. 만약 K의 처지가 지겨워 L이 헤어지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K의 상상 속에서는 늘 L을 웃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힘이 없다. L을 웃게 할 힘이 없는데. 한 번도 생각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왜 하필 오늘 L은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너도 지칠 거 아니야? 네 결과만 신경 쓰고 네 것에만 슬펐다 기뻤다 해도 벅찬데 내 감정까지 받아야 하니 얼마나 버겁냐고! 아니야? 우린 잘 못 만났어. 서로한테 하등 도움도 안 되잖아.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네가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잖아. 너한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아니라고 부정해야 할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병사 37번도 될 수 없는 K가 L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L이 말하지 않는 것이 많아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묻기가 두려웠다. K가 당당히 물을 수 있는 상황이 되기를, 그렇게 바뀌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쌓아뒀던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차라리 욕이라도 하라고! 이제 긍정적인 척도 지쳤다. 우리가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 언제? 대체 무슨 수로? 평생 이렇게 살 거 뻔 한데 아닌 척 희망고문이나 하고 있잖아. 욕이라도 해! 왜 아무 말이 없어. 이것 봐. 지금 바닥을 치면서도 서로를 더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 이게 할 짓이야?”      

L의 말은 K의 예감대로였다. 그런데 L의 말에 동의한다고 말해버리면 헤어지는 것에도 동의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 없어? 이제 끝이라고. 헤어지고 잘 돼서 티비에 나와도 후회하지 말라고 그 딴 헛된 상상이나 하면서 실실 쪼개는 짓 이제 그만 할 거라고."      

언젠가 L과 오랜 무명을 지나 유명해진 배우가 나온 예능 프로를 본 적이 있다. 그때 K가 농담처럼 했던 말을 L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 그때 L와 K는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될 미래는 짐작도 못한 채. 그때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상황이 변해도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도 상황도 변하지 않아도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K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L이 마침내 말했다. 

"진짜 다 끝나긴 했나 보다. 너 만나면 혹시나 내 마음이 바뀔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네. 잘 지내.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큰길로 나가는 L을 K의 시선이 끝까지 따라간다. K가 오디션 합격 통지를 받았으면 오늘 헤어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조금 미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금세 이런 날이 왔을 것이다. L의 말이 다 맞다.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의지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야 했다. 헤어짐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L이 없으니 이제 마음껏 울어도 된다는 생각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가 서로의 눈물샘을 막고 있던 돌덩이 같은 존재였다. 그저 고이고 썩어가는 눈물을 막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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