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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30. 2019

누군가의 혼잣말 上

가끔 꿈에 나오는 L




가끔 꿈에 나오는 L. 나는 L을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가치관이 비슷하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옆에 있기를, 자주 보고 이야기할 시간만 내주면 충분했다. 마음은 누구보다 맹목적이었다. 다 상관없었다. 하지만 행동은 맹목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L을 그대로 보냈다. 아니, 내 행동과 상관없이 L은 사라져 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는 L이 상황과 상관없이 조금 뻔뻔하길 바랐는데 L도 그저 나와 대화만 할 수 있기를 그것만 바라면 됐는데 그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L은 꿈에 나온다. 꿈에서는 L을 향해 소리치고 따진다. 내가 L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과 행동들. 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L이 어떻게 반응할지 만들어 낼 수 없나 보다. 꿈속의 L은 내 얘기에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있다. 어느 날은 그게 서운했고 어느 날은 말이라도 한 것이 속 시원했다. 


L이 연락을 끊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걱정뿐이었다. L의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 이해했다. L이 밉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아는 L이라면 상황이 정리됐을 때 분명 연락을 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믿음 때문에 L을 미워하거나 아쉽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문득 알 수 없는 초라함 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애인이 잠수를 타서 헤어진 건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친구는 애인을 있는 힘을 다해서 원망했다. 말에는 원망이,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와 너무도 비슷한 감정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을 하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L과 내가 무슨 사이라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애인을 원망하는 것에 맞장구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L을 걱정하면서도 언젠가는 연락이 올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알 수 없는 초라함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 처음 어렴풋이 단지 L의 옆에 있는 것, 이야기만 할 수 있어도 만족할 거라는 내 마음은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것 같다. 



L은 내 믿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지나 인터넷 메신저로 연락을 해왔다. 그때 내 상황이 그렇게 좋을 때가 아니었다. 이직에 실패하고 한국을 떠나고 싶어 무작정 배낭여행을 떠난 상태였다. 기간이 길어지자 막상 싫어서 떠났으면서 돌아가고 싶기도 했고 돌아가면 그대로 있을 현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안 된 것 같았다. 도피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내 앞에 나타난 L이 나의 구원자고 우리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L이 상황이 좋지 못했을 때 잠수를 탔던 걸 다 잊었던 모양이었다. 


L은 한국이 아니었고 해외근무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매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봄볕에 눈 녹듯 사락사락 사라졌다. 10분 얘기한 줄 알았는데 1시간이 지나있었다. 내가 바란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둘 다 인터넷 사정이 좋지 못한 곳에 있었고 시차가 있어 메신저로 대화하는 것은 조금 답답했다. 나는 L이 있는 곳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L은 믿을 수 없다며 기뻐했다. 놀러 오겠다는 사람은 많아도 진짜 온 사람은 없었다면서. 돈이 없어서 경유를 2번 하고 버스를 10시간 타는 경로를 택했다. 대략적인 날짜는 말했지만 정확한 도착시간을 알리지 못한 상태였다. 버스를 타기 3시간 전 한글이 지원되지 않는 타자로 L에게 도착시간을 적어 메일을 보냈다. L이 메일을 확인할지 또 답장을 보냈을지 확인도 못한 채 버스에 탄 나는 버스에 내려서 L이 없는 상황을 머릿속에 떨치려 10시간 동안 꽤 고생을 해야 했다. 덕분에 멀미도 없었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캄캄한 이국의 어느 대로변에서 가로등 빛을 받고 서있던 L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노점 술집에서 맥주와 한국식 닭튀김을 먹었다. 10시간 동안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갑자기 밀려와 정신없이 닭튀김을 집어먹었다. L은 내가 오면 제일 먼저 사주고 싶던 음식이라고 말하며 한국하고 맛이 비슷하지 않으냐고 했다. 그제야 맛을 조금 음미해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온 과정을 설명했다. L은 나라면 못했을 거라고 대단하다고 했다. 그건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꽤 오래 L의 집에 머물렀다. 주로 평일에는 혼자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고 주말이면 L의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새벽일 때 가끔 L이 잠들어 문을 열어주지 못할까 걱정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 L도 같은 걱정을 했던 건지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은 다 활짝 열어 놓고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도 또 어김없이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미안했다. 들어가서 자라고 L을 깨우면 술냄새가 살짝 풍겼다. 주말 낮 L은 밀린 잠을 자고 나는 다녀온 짐들과 사진을 정리했다. 밤에는 L이 심혈을 기울여 조사했다는 현지인 맛집에 가서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몇 주 정도 반복하니 L의 집이 꼭 우리가 예전부터 같이 사는 집 같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어쩌면 꼭 내 인생 안의 다른 인생 같은, 별책부록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안함도 초라함도 패배감도 느낄 필요 없는 인생에 몇 안 되는 날일 거라고.


한 번은 몇 번 망설이다가 L에게 주말에 같이 여행을 가겠냐고 했다. L은 일정이 안 될 것 같다고 했고 나는 그 주말 그 계획대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다른 도시로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L이 전화를 했다. 여행 가 있을 때 연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더니 잘 다녀오라고 전화했다고 했다. 갑자기 서늘한 외풍이 들어오고 회색빛으로 삭막해 보이던 터미널이 따뜻한 풍경으로 보였다. 도착해서 여행을 하고 숙소로 들어와 있는데 또 L이 전화를 했다. 다시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더니 여행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전화했다고 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며 예약한 숙소가 사진과 다르게 너무도 형편없어서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한다고 조금 징징댔다. L은 웃으면서 내가 같이 못 가서 그런 것 같다고 내 징징거림을 받아주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숙소가 형편없어도 마음 따뜻하게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오기를 바라지 않던,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L은 동료에게 차를 빌려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여기 지금의 일들만 이야기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고 어쩌면 정리해야 할 것들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는데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서로를 위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니까 그 이야기들을 꺼내서 혹시라도 관계가 어그러질까 너무도 두려웠다. 운전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 차를 빌려 준 사람은 뭘 믿고 빌려준 거냐 돈 한 푼 없이 입국해서 집에 못 가는 것 아니냐는 둥 농담 따먹기만 하고 있었다. 수속을 다 마치고 남은 잔돈을 털어 햄버거를 사 먹고 있는데 L이 전화를 했다. 잘 있다 가는 거냐고 불편한 것 없었냐고 할 말은 더 없냐고 했다. 나는 살짝 목이 막혔지만 너무 잘해줘서 고마웠다고 한국 오면 꼭 보자고 말할 수 있었다. L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걸로 별책부록은 끝났다. 내 인생의 본편에 L이 들어올 거라고 믿고 싶었고 믿어야만 했다. 



몇 달 후 L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L에게서 한국 왔다고 연락이 왔다. 내심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해봐야지 씩씩한 척하고 있던 내 보호막이 사라락 녹아내렸다. 우리는 그다음 주 주말 만나기로 했다. 장소를 옮겨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시간이 눈 녹듯 사라지도록 이야기하고 싶었다. L은 만나기로 한 날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L과 수많은 대화를 나눴고 공감했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L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되니 내가 L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연락이 안 되는 L의 전화번호뿐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L은 이제 다시 연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는 L에게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L이 왜 연락을 하지 않는지 나를 만나지 않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결국 이국의 공항에서의 만남과 한국에 도착한 날 전화가 우리의 인연의 끝일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가정이지만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내가 뭔가 다른 행동이나 다른 말을 했을까?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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