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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Oct 09. 2019

기억력과 행복의 관계

과거에 서 있는 사람의




예전 일들을 잘 잊어버리는 편일까? 잘 모르겠다. 어떤 일들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어떤 일들은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주로 친구들과 예전 일을 추억할 때 이 사실을 깨닫는다. 같은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공통적인 기억도 있지만 친구만 기억하는 일도 있고 나만 기억하는 일도 있다. 언젠가는 기억을 못 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일기를 쓰려 노력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잊어버린 것들은 일기장에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건 굉장히 사소한 순간이었는데 사소했기 때문에 잊히고 또 일기장에 쓰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예전에 네이트온으로 채팅을 하면 채팅이 자동 저장되는 기능이 있었다. 열정적으로 웃으면서 채팅한 대화 내용은 가끔 심심할 때 읽곤 했다. 중요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밥 먹고 있다 과제하고 있다 아니면 말장난들이었지만 또 그런 너무도 사소한 이야기라서 재미있었다. 어쩌다 그때 네가 채팅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대부분 당연히 기억을 못 했고 부끄러워하며 그런 건 왜 보느냐고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 읽다 보니 상대는 기억도 못하는 사소한 말들을 혼자 기억한다는 것이 묘하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그 순간에 너무 매몰되어 버려서 다른 이들은 현재에 있는데 나만 과거에서 그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이상하게 초라해졌다. 그리고 말들은 변한다. 나는 그의 말들을 기억하지만 그 말들은 가볍게 날아다니고 금방 변했다. 그건 상대의 탓이 당연히 아니었다. 잊혀야 할 말들이 쓸데없이 흔적을 남긴 탓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읽지 않았고 말들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때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기억력이 좋다는 건 대체로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독이 될 때도 있다. 이를테면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애인의 전화번호가 아직도 기억난다거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모진 독설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억양과 어투까지 잊히지 않고 재생된다거나 교통사고가 났던 순간의 상황과 아픔을 계속 생생하게 기억한다거나. 이상하게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하는 순간들은 쉽게 잊혀 버리고 잊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들은 끝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 같다. 행복했던 일들은 의식적으로 떠올려야만 겨우 떠오르는데 힘들었거나 창피했던 일들은 문득문득 알아서 어찌나 잘 떠오르는지. 


어느 날에는 엄청나게 좋은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끔찍한 지난날을 잊을 수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을 때도 있다. 분명 현재의 상황은 불행하지 않은데 자꾸만 과거의 아픈 일과 말이 따라와 다시 나를 그때의 순간으로 끌고 가는 것 같을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날 좋은 날 혼자 겨울인 사람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까 억울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전부 다 쉽게 잊어버리면 조금 쉽게 행복할 수 있을까? 



브로콜리너마저의 행복을 들어보면 행복에 필요한 조건은 이것뿐이라는 듯 가사는 딱 4 문장뿐이다.

지난 일들을 기억하나요. 애틋하기까지 한가요. 나는 잘 잊어버리거든요. 행복해지려구요.

처음 들었을 때는 역시 다 잊어버리면 적어도 과거 때문에 불행할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도 다 잊어버리는 건 아무리 그래도 아쉬울 것 같았다. 계속 따라 부르며 듣다 보니 잘 잊어버린다의 '잘'의 의미가 다 쉽게 잊어버린다는 게 아니라 선택적으로 골라서 요령껏 잊어버린다는 뜻인 것 같았다. 행복의 비밀은 사실 별게 아닌가 보다. 쓸데없이 지난 일을 애틋하게 생각하지 말 것. 잘 잊어버릴 것. 이 별것도 아닌 것이 잘 안 돼서 나를 괴롭게 했다.


꽤 오래전 팔에 이상한 저림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일단 검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도 무서웠지만 그 증상이 평소에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느낌이라 두렵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누워서 검사를 받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검사였는데 검사를 하는 간호사에게 내가 어떤 질문을 했다. 그는 웃으면서 시니컬한 대답을 했고 옆에 있던 다른 간호사도 같이 웃었다. 한동안 나는 그 대답을 잊으려 하면서도 자주 떠올렸다. 그때 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형편없는 정신상태라 아무 말도 못 했다고 곱씹으면서. 평생 못 잊을 것 같았는데 얼마 전 그 사람이 했던 말을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잘 잊어버리지 못해도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아픈 말들도 장면도 언젠가는 저절로 잊히기는 하나보다. 요령껏 잊어서 행복할 능력은 없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아 행복해질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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