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과거를 회상하며
많은 것을 알고 지낸 사람이 있다. 기간으로만 보면 5년 정도.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좋든 싫든 함께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가 몇 년 전 내가 정서적으로 힘들 때와 비슷한 감정과 상황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느꼈던 감정들과 일들을 이야기해주다 보니 친구와도 잘하지 않는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 나는 그의 과거를 거의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올해 초 근무지를 옮기면서 물리적으로 멀어지게 됐고 오랜만에 사적으로 만나 대화를 하게 됐다. 미뤘던 대화가 많아 한참을 말해도 이야깃거리가 바닥나지 않았다.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이 일은 동생만 알고 있다고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친하던 한 친구와 오해가 생겨 다 같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전부 멀어지게 됐다고 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웃으며 이야기하고 놀던 친구들과 전부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반의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서 학교 생활하는 건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가끔 집에 와서 울기도 했다고 했다. 그렇게 학교는 아무렇지 않게 다녔지만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는 졸업하고 연락을 잘 안 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많이 없는 것 같아서 가끔 좀 씁쓸할 때가 있다고 했다. 나는 흠칫했다. 처음에는 그토록 오래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다음으로는 내가 그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던 이야기들을 돌아봤다. 그 앞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이 어쩌고 저쩌고 많이도 떠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고등학교 때 일이 떠올랐다. 나도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입을 뗐다. 1학년 학기 초에 10명씩 무리 지어 친하게 지냈다. 아무 공통점이라고는 없고 단지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같은 반이 되고 같이 다녔으니 모든 게 잘 맞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불만들을 퍽 잔인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누군가 어디서고 어떤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들 그런 것 같다고 하고 그 즉시 그 친구와는 말하지도 않고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동의하고 행동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했다. 어차피 학기 초였고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금세 친해져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니까. 두 번째 똑같이 그런 일이 반복됐을 때 그제야 의아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그 친구가 잘 못 한 걸까?
그렇지만 비겁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무리의 의견에 동의했고 친구를 외면했다. 그리고 또 나만 생각했다. 사소한,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잘못으로 나도 무리에서 소외될 수 있겠구나. 그 시절에 친구들의 무리에서 떨어진다는 건 우주 저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로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네 친구들과 다른 더 먼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더 두려웠다.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친해지려 애쓰고 집에 와서 중학교 친구들과 타자로 ㅋㅋㅋ를 치며 채팅을 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물론 놀고 싶기도 했지만 빠질 수가 없었다. 혹시나 다음 날 나를 모른 척할까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집에서 혼나는 일이 잦아졌고 괜히 내 상황을 이해 못하는 엄마가 미웠다. 상처 받은 친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두려웠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일이었고 단지 운이 좋아서 그런 상처를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와 내가 같은 장소와 시간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괜히 미안했다. 나처럼 그를 외면했던 친구들도 마냥 편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거라고 마음 한 편에 계속 미안함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막상 말을 해 놓고서 그가 내 어쭙잖은 얘기에 오히려 상처 받지 않을지 걱정했다. 우리가 그동안 나눈 이야기에 수많은 상처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말 못 한 이야기였다면 꽤 큰 상처였을 테니까. 다행히 그는 내 이야기를 오해하지 않았고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비일비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공간에 오래 함께 있어야 했던 그 시절의 힘듦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이라는 게 지나고 나서 떠올리니 좋았던 것만 되짚고 상처 줬던 기억은 쉽게 잊어버려 미화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사실 그때 매일 긴 시간 집보다 오래 가깝게 있어야 했던 친구들에게 잔인했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시절을 지나며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성정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상황에 쉽게 휩쓸리고 나만을 걱정하는 그저 그런 인간이라는 걸. 그 사실이 지금도 나를 따라다닌다. 이게 내가 받은 벌일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덕에 내 말과 행동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는 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