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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Nov 12. 2019

물살을 거슬러 만나다

비가 와서 다행인





D는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입술 안쪽을 앞니로 잘근거렸다. 눈 주변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퇴근은 한참 남았다. 누가 말을 걸어 입이라도 떼려 하면 뜨거워진 눈에서 곧바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처럼 자료를 들여다보며 타자를 쳤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쿵쿵 소리가 날 때마다 몸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D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늘게 오래 내뱉으며 심호흡을 했다. 당장 퇴근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D는 집을 떠올렸다. 춥고 어두운. 쉴 공간이 아니라 D가 가서 불을 켜주고 따뜻하게 해줘야 할 것 같은 D의 집. 그 집을 생각하니 차라리 퇴근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다. 명치끝부터 갈비뼈 옆까지가 뜨거워져 오른팔로 몸의 반을 감싸 안았다. 속은 뜨겁고 손은 차가워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D도 알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모두의 사정을 조합하면 D가 양보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D의 마음은 억울하고 서운하다고 말하고 싶어 했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고 욕도 하고 싶었다. 그 마음들을 입술을 뜯으며 꾹꾹 눌러버렸더니 단지 울고만 싶었지만, 그것만 바랐지만 우는 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D는 혼자 울고 싶지는 않았다. 차갑고 어두운 방에서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편하게 울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몸은 너무 지쳐서 집에 들어가 눕고 싶었지만 방은 마지막으로 청소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오늘 아침 나오면서 내일 모처럼 아무 일정 없는 휴일이라 청소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렇게 활기찬 다짐이 멀고 먼 과거의 결심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불러 넋두리를 할 힘도 없었다. 연락을 하는 것, 웃으며 누군가를 만나는 것,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 다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때 Y에게 언제 퇴근하느냐고 문자가 왔다. 평소 같았으면 너무도 반가웠을 그 연락에 답을 할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D는 괜스레 눈두덩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아 숨을 길게 뱉었다. 다 지나갈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려 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속이 더 뜨거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D는 반쯤 건넌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끝까지 가다가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데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와버린 것 같은 외나무다리. D는 1분 1초라도 빨리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여러 가지 대안들을 스스로에게 들이밀어도 괜찮아질 것 같은 위안이 될 것 같은 것이 없었다. 단지 확실한 건 이대로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것뿐. 



시간은 D의 감정과 몸상태에 상관없이 정확하게 흐르고 흘러 퇴근할 때가 되었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봐도 그 말과 또 다른 말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겨우 가라앉힌 줄 알았던 속이 다시 뜨거워지고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입술 안쪽을 꾹 씹어 눌렀다. 창밖으로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몸이 지치도록 걸을까 싶었는데 우산은 없었고 비를 맞으면서 걷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모든 것이 D의 반대방향으로 멀어지는 날 같았다. 모두 흘러가는 물의 방향대로 잘 가고 있는데 혼자 물살을 거스르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보고 성실히 준비했던지 전부 우산을 쓰고 있었다. D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따뜻할 것만 같은 불빛이 가득한 큰 골목을 지나 어두운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었을 때였다. 


“어이쿠, 좀 일찍 나올 걸. 비 다 맞았네. 왜 연락이 안 돼?”

고개를 들어보니 우산을 든 Y가 눈앞에 서 있었다. D가 웃으며 입을 떼려 하자 지금까지 밀어 삼키려고 애쓰던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 D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Y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Y의 목이 당황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D는 Y의 옷에 눈물이 묻을까 고개를 들고 뒤로 한 발 옮기려 했다. 그와 동시에 Y가 한 팔을 들어 D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서 D는 온몸의 무게를 Y에게 기대게 됐다. 그제야 D는 큰 소리로 엉엉 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참아온 눈물을, 입술 안쪽이 다 헐 만큼 참아온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Y는 그 눈물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D의 등을 토닥이며 D를 잡아주었다. D에게도 Y에게도 비가 와서 너무도 다행인,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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