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취할 수 없는
기숙사 발표가 개강이 얼마 안 남은 시기에 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나를 기숙사에서 탈출하게 도와준, 지하철로 3 정거장 거리에 사는 삼촌이 급히 하숙집을 알아봐 주었다. 삼촌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있게 가격과 방 상태를 말했다. 가격은 기숙사보다 비싸지만 방은 꽤 괜찮다고 했다. 개강을 며칠 앞두고 학교로 와서 직접 방을 본 부모님은 크게 당황했다. 가격을 듣고 상상한 방에 비해 시설이 너무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급하게 시간을 내서 방을 구해준 삼촌이 있어 격하게 반응하지는 못하고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그 방은 2층짜리 주택 옥상에 컨테이너를 얹어 만든 불법 증축물이었던 것 같다. 그 안을 4개의 방으로 나눠놓았다. 그래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외벽에 붙어 있는 철제 계단이었고 아빠는 술 마시고 올라오다 술 다 깨겠다고 했다. 삼촌과 나는 웃었고 엄마는 좀 심란한 듯했다.
출입문 입구에 공용 세탁기와 에어컨이 있었다. 세탁기는 그러려니 했지만 에어컨의 위치는 정말 황당했는데 여름에는 방문을 다 열어 놓아야 냉기를 복도를 통해 들어오게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나는 학기 중에만 살고 그 하숙집을 탈출했기 때문에 그 황당한 에어컨은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방으로 들어가니 휑한 공간에 덩그러니 전신 거울 하나만 놓여 있었다. 아마 전에 쓰던 사람이 놓고 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창문도 있고 화장실도 있어 나름대로 방 안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트에 가서 조립식 앉은뱅이책상도 사고 플라스틱 서랍도 샀다. 공간을 사람 사는 곳처럼 만들어준 부모님이 떠나고 본가에서 쓰던 오래된 이불을 깔고 누웠다. 방은 낯설었지만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 좋았다. 두 번째보다 세 번째는 조금 덜 외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간과도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잘 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사를 할 때마다 길게는 1달 정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게 내가 예민해서 또는 겁쟁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아직 내가 살 공간에 정을 붙이지 못해서 또는 익숙해지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친구들과도 얘기를 해보니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본가에 살 때 티비중독자였던 나는 기숙사에 살면서 내 방을 얻게 되면 제일 먼저 티비를 설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부터 중고판매점을 돌면서 티비를 구하러 다녔다. 2~3 군데 정도를 돈 끝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엄청 오래된 티비를 3만 원 주고 샀다. 그 티비를 플라스틱 서랍 위에 올려두고 혼자 뿌듯했다. 티비가 있으니 방에 온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살면서 당면한 문제는 잠금장치였다. 그 방만 내 공간이었기 때문에 방의 잠금장치는 똑딱이 버튼이었다. 열쇠 없이도 잠글 수가 있으니 자꾸만 열쇠를 안에다 두고 문을 잠가 버리는 일이 생겼다. 희한하게도 문을 딱 닫자마자 열쇠를 두고 나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면 열쇠 아저씨를 부르고 안 그래도 부족한 용돈을 허망하게 날려야 했다. 열쇠 아저씨가 문을 여는 걸 보니 너무 쉽게 열려서 놀라긴 했지만 사실 누가 들어와도 훔쳐갈 것도 없는 방이었다. 멍청한 짓을 두어 번 더 한 끝에 열쇠를 복사해서 친구에게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뒤로는 열쇠를 잘 가지고 다녔다.
여태까지 살아 본 방 중에 시설은 제일 별로였지만 혼자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제일 만족하며 살았다. 다만 아쉬운 건 부엌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컨테이너를 방으로 나눈 것이다 보니 주인은 화재에 민감했던 것 같다. 들어올 때부터 방에 취사도구를 절대 두면 안 된다고 꽤 여러 번 강조했다. 주인집은 식사시간에만 문이 열려 있고 식사시간은 아침은 7-8시 저녁은 6-7시까지였다. 나는 그 식사시간을 제대로 챙겨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1달에 한번 먹을까 말까 했다. 저녁은 아예 못 먹었고 아침은 밤새고 들어오다 시간이 맞으면 가끔 한 번씩 먹었다. 그마저도 모르는 사람들과 앉아 밥을 먹으려니 어색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후회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오순도순 식사하는 그런 장면은 있을 수 없었다. 하숙비에는 밥값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걸 다 날리고 있으니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도 딱히 대안이 없다고 생각해 계속 하숙집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친구가 다음 학기부터는 방 두 개짜리 집을 구해서 같이 살면 어떠냐고 했다. 친구도 하숙집에 있었는데 불편해서 살 곳을 다시 알아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 어머니와 함께 학교 주변의 집을 보러 다녔다. 부동산에서 방 두 개짜리인 집을 몇 개 보여줬다. 우리는 아무 데나 다 좋아 보였다. 하지만 어른의 눈에는 영 탐탁지 않아 보였던 것 같다. 친구는 나에게 고시원으로 같이 옮기는 건 어떠냐고 했다. 고시원은 부엌도 있고 어차피 방에서 잠만 잔다는 생각에 엄마를 설득했다. 고시원은 더 싸고 부엌도 있고 하숙집에서 밥 하나도 안 먹어서 돈 아깝다고. 그래서 나는 고시원으로 이사했고 친구네 부모님은 고시원은 안 된다고 해서 친구는 내가 살던 하숙집 그 방으로 들어가게 됐다. 덕분에 이사는 수월했다.
*애 - 언제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증 - 철제 계단과 식사 해결
*박살난 로망 - 드라마 응답하라 1994 같은 하숙집
*총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