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화. 떠날 때만 해도 몰랐지.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그땐 그랬지. 뭘 몰랐지.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건지도.




디지털 노마드로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매년 3월이 되면 은근하게 마음이 들뜬다.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일 수도 있고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하는 기대감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갔던 시기가 3월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로 떠나던 그날을 회상해 보면, 그렇게 로맨틱하거나 설레는 시간이었다기보다 오히려 구질구질함에 가까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는 건지도.



장기 여행을 꿈꿨던 우리의 초기 계획은 ‘5월 중순에 스페인으로 떠난다’였고 예상보다 퇴사 가능 시기가 앞당겨짐에 따라 두 달가량의 시간이 생기게 됐다. 남편은 작년 부모님 환갑 여행으로 다녀온 제주에 가서 지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셋집 만기는 5월이라 3월에 집을 빼려면 갑자기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늘고, 집 정리에 대한 계획도 앞당겨야 했지만 이미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간다는 것부터가 혼돈의 시작인데 하나쯤 더해지는 게 뭐 어떤가 싶었다. 


호기롭게 제주에서 두 달 지내보자 정하긴 했지만 어디서 지내야 하고, 어떤 것을 준비해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우선은 제주 한 달 살기 정보가 있는 카페 몇 군데에 가입하고 최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 기피하고 싶은 것을 정해 후보를 추려냈다. 실제로 경험하기 전이니 정확도는 다소 떨어졌겠지만 서로의 취향과 한계를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제주 두 달 살기도, 장기여행도 모두 처음인 만큼 여유롭게 준비 기한을 정했음에도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출발하기 전 날엔 결국 둘 다 밤을 꼴딱 새워서 짐을 싸고 마지막으로 100리터 봉투에 자질구레한 쓰레기를 눌러 담아 정리한 다음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각자 38리터 가방을 하나씩 메고, 30인치의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챙긴 두 대의 킥보드까지 함께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어마어마한 짐인데, ‘혹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는 라면박스 두어 개에 짐을 넣어 제주도 숙소로 택배를 보내기까지 했다.


밤새 내리던 비는 날이 밝자 흩날리는 수준으로 바뀌었지만 우산을 들 손이 없었다. 억지로 우산을 들려고 했더니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접어버렸다는 게 맞겠다. 높은 습도를 유발한 날씨 덕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단 한 번도 짐을 제대로 채워 넣고 배낭을 메 본 적이 없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고 공부하겠다며 욕심껏 챙긴 책들과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버리지 못한 잡다한 주방살림이 담긴 캐리어의 무게가 더해져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른 제주행 비행기에서는 놀라울 만큼 기억이 없다. 출발의 설렘이 밤샘의 피로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 그리고 따뜻할 거라 예상한 남국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우리가 출발한 곳보다 추웠다. 김포공항에서 호기롭게 외투를 쓰레기통에 넣으려다가 단지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행이 아닌 것이 있었다면 공항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렌터카 예약도 하지 않은 데다가 짐이 많으니 함덕까지 급행 버스 타고 가서 북촌까지 들어가는 택시를 타도 됐을 텐데 그 짐과 배낭을 들고 일반 버스에 올랐다. 빈 자리가 우측 1인석뿐이어서 앉자마자 정신없이 헤드뱅잉을 했다.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캐리어가 흔들리면 깨고, 내릴 곳을 지나쳤을까 봐 화들짝 놀라 깨길 반복하면서. 낑낑거리며 짐을 챙겨 동광양에 내렸다가 다시 북촌 숙소 앞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사진으로만 보던 숙소 앞에 내렸을 땐 '드디어!' 싶은 마음에 기뻤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슬픈 현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3층까지 그 모든 짐을 이고 지고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절대로, 다시는 절대로 이렇게 무식하게 짐을 챙기지 않겠다고 수백 번 다짐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던 인터넷 세상 속 명언처럼 우리는 제주에서 다시 나갈 때도 이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했지만...



최근에 제주 한 달 살기를 결정한 지인을 만났을 때 다 챙겨갈 필요 없다고 신신당부를 하며 우리의 (무식하게 용감했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았던 품목이 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며 줄여가보시라고 덧붙이긴 했다. 


이제는 각자 노트북 백팩 하나에 20인치 캐리어 하나씩만 들고도 다양한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생긴 데에는 제주에서부터 조금씩 쌓인 경험 덕분일 것이다. 실제로 경험해 보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다. 그래도 한창 준비 중일 지인에게 꼭 캐리어와 가방에 비슷한 무게의 짐을 넣고 집 안에서라도 여기저기 움직여보시라고 메시지 하나는 보내놔야겠다. 그리고 나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시게 될 거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0. 여행이 좋아서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당신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