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경주
휴일이 왔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휴일이다. 이 주전의 휴일은 이런저런 할 일들을 처리하며 보냈고 이번 휴일은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좋아한다고 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마음속에 여행을 품고 틈이 나면 계획을 하고 계절이 바뀔 땐 떠나는 것을 목표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작년엔 작은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에 쓸 시간이 없어졌다. 시간이 없었지만 사실 그 보다 금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맞다. 쉬는 날이 적었기 때문에 밀린 집안일과 가게를 비우면 생기는 불안함에,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 자체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정말 떠나고 싶었고, 이번 휴일도 여행을 앞뒤로 여러 할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잠시 몸 안에 바람을 채워주기로 했다. 6시간 남짓 주어진 시간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보낼지 생각을 하다 사랑하는 곳, 경주로 떠나기로 했다.
분주한 아침을 보내다 11시가 훌쩍 넘어선 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했다. 무궁화호는 찾아볼 수 가 없었고, 시간이 늦어 ktx로 예매를 했다. 기차에서 읽을 책을 챙겼으나 ktx는 17분이면 경주에 도착한다. 새삼 그 속도에 놀라고 내가 있는 이곳과 참 가까운 곳이구나 생각하면서도 기차에서 책 읽는 묘미가 짧아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첫 목적지인 경주 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신경주역을 이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주에서 본 건축물들은 모두 경주를 닮았다. 층수가 낮고 한옥 모양을 하거나 색채가 부드럽다. 그런데 신경주역은 어느 곳에서 보는 역과 같아 조금 아쉬웠다. 버스에서 내리자 드디어 감상할 곳을 만났다. 4월 마지막 주의 경주는 길에 이팝나무가 한창이다.
경주 국립 박물관은 처음이었다. 평일이라 꽤 한적한 공간이지만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동네 주민 분들이 편하게 산책을 하는 듯한 모습도 많이 보았고, 초등학교에서 견학을 왔는지 줄을 지어 들어가는 무리도 보았다. 몇몇 카메라를 든 외국인들이 보여 역시 관광지 경주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리 건물의 사진을 보고 간 것이 아니어서 이 박물관에 들어왔을 때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유리가 많아 차가워 보이는 인테리어가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연스러운 색의 건물들과 그 건물들의 둘러 피어있는 불두화가 참 잘 어울렸다. 많은 이들이 불두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감상을 하며 봄을 즐기고 있었다. 건물의 난간은 백자 모양으로 뚫려 있었고 건물의 기둥 또한 섬세한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난 건축물이나 인테리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곳에 들어와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꽤 시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꼭 외곽에 위치한 듯 주변 환경이 조용하여 더욱 좋았다.
내부에선 그간 발견된 신라시대의 토기나 장신구를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불교 미술품을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모든 곳에 들어가 보진 못 했으나 잠시 타임슬립을 한 것처럼 재밌었다. 현재도 과거도 사람에게 필요한 물품은 다 같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다양한 액세서리가 예뻐 시선이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불교 조각상을 보고 사유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갔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귀여운 신호등)
(작은 돌을 보면 쌓고 싶어 지는 게 한국인)
(거리에 이팝나무가 예쁘게 폈다.)
식사를 하러 가던 중의 경주 읍성.
여기에 읍성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지 못한 장소를 선물로 받았다. 커다란 꽃나무엔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피어져 가는 중이었다. 그 옆으로 큰 나무가 있었는데, 동네 주민 분이 그 옆의 돌담에 기대 쉬고 계신 모습이 평화롭고 나른해 보였다. 산책하는 강아지와 보호자 분들도, 골목을 지나가는 고양이도, 모두 평화로워 그 시간이 되게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돈가스를 먹으러 왔다. 경양식 로컬 음식점인 곳이다. 작은 내부에 동네 아저씨들과 사장님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그 포스에 잠시 당황했지만 난 배가 너무 고팠고, 낯선 사람이지만 우리 아빠와 비슷한 나이대시니깐, 편히 생각하고 앉아 주문을 했다. 돈가스도 치즈돈가스도 너무 좋아하지만 이 날은 돈가스 정식을 주문했다. 돈가스 1장과 생선가스 2조각, 미니 함바그 조금이 함께 나오는 구성이다. 위의 양배추와 마카로니 샐러드가 너무 정겹고 그리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어릴 적 즐겨 마시던 요구르트도 추억 회상에 큰 역할을 했다. 청양 고추와 함께 나오는 곳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중국집에서도 단무지 대신 양파를 먹게 된 어른으로서 느끼한 돈가스와 청양 고추의 조합은 먹어 본 적 없지만 대 환영이다. 포크와 나이프는 장미 그림이 찍혀 있는 냅킨에 쌓여 왔다. 이것마저 그리워져 예전에 동네 음식점에서 배달시켜 먹던 추억이 솔솔 새어 나왔다.
돈가스는 그냥 맛있는 돈가스였다. 특별한 소스의 맛은 아니고 고기가 특별한 것도 아닌, 그냥 맛있는 돈가스. 노포, 동네 맛집의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아는 한의 가장 맛있는 맛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하지만 참 맛있는 맛, 생각한 대로 맛있는 맛. 바삭하고 얇은 돈가스는 마지막 한 입까지 바삭하게 맛있었다. 청양고추와도 너무 잘 어울려서 마지막 한 개가 너무 매워 남긴 것 빼고는 싹 다 먹었다. 타르타르소스를 얹은 생선가스는 급식에서 먹던 추억의 맛보단 조금 더 맛있었다. 원래 타르타르소스를 참 좋아하기 때문에, 부드러운 생선 가스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흡입하듯 후루록 먹었다. 친구들과 돈가스를 나누어 먹을 땐 다 썰어 놓고 먹었지만 이번엔 한입 한입 썰어가며 먹었다. 즐거웠다. 아저씨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내용은 난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었지만, 정겹게 식사를 했다. 치즈 돈가스도 고구마 돈가스도 좋아해서 다시 온다면 꼭 먹어보고 싶다.
이제는 폐역이 되어버린 경주역.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 마지막 여행이 친구들과 함께한 2월의 경주 여행이었다. 그땐 이 경주역으로 오며 경주스러움과 시골스러움을 느꼈다. 통로에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에서 여행의 시작과 끝에 사진도 찍었는데, 이제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가지 못할 곳이 되어 오히려 더 기억에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추천받은 카페를 찾아가는 길, 정겨운 골목의 주택가를 돌며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민트색이 예쁜 한 집을 찍고 그 앞에 새싹이 가 심긴 작은 화분도 찍었다. 아이는 언제 새싹이를 심었을까? 궁금해하던 찰나, 집에서 주인으로 생각되는 남성분이 나오셨다. 멋대로 사진을 찍고 있었던 터라 당황스러움과 죄송함에 부랴부랴 사과와 변명을 늘어놓자, 전혀 개의치 않으신 표정과 말투로 괜찮다고 웃으며 답해주셨다.
화분이 너무 귀엽다고 말을 꺼내자, 집주인 분(새싹이를 심은 아이의 아버지로 여겨지시는 분)께선 한숨을 쉬시며 이 에피소드를 풀어놓기 시작하셨다. 아이가 씨앗을 심었는데 딱 두 개의 싹을 보고 싶어 씨앗도 딱 두 개만 심었다고 했다. 보통 씨앗을 여러 개 심으면 몇 개가 움트는데, 고작 두 개를 심어 싹이 트지 않아 아이가 실망을 할 것 같다 하며 아이의 아버지는 걱정을 하셨다. 그 이야기가 안타깝고 귀엽고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까지 느껴져 듣는 나는 그저 웃음이 지어지는 이야기였으나 아이의 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시며 걱정을 하셨다. 그때, 집 안에서 찾았다! 를 외치며 아이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분이 나오셨다. 그분의 손엔 작은 지퍼백이 들려있었고 그 지퍼백엔 씨앗이 들어있었다. 아마 아이가 씨앗을 심고 남은 씨앗을 다른 곳에 보관을 해 두었고, 걱정을 하던 부모님은 몰래 씨앗을 더 심기 위해 그것을 찾다가 이제 그 숨겨진 씨앗을 찾은 것이다. 안도하시는 아버지는 다행이라며 웃음이 만개한 얼굴을 하고선 두 분은 씨앗을 화분에 몰래 더 심으셨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 대단하고 역시 부모님은 365일 산타클로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함께 안도를 하고 기분이 좋아진 내게 두 분은 어쩌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왔냐 하며 안부를 물으셨고, 동네의 찐맛집 카페를 추천해 주셨다. 신기하게도 내가 추천을 받은 그 카페였다. 열심히 추천을 해 주셔서 그냥 모른척하며 추천을 받았다. 사실 추천 덕분에 더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기에 오히려 감사했다. 데려다주시겠다는 배려를 마다하고 동네 산책을 더 하며 구경을 하고 카페로 향했다.
예쁜 카페에 도착했다. 고양이는 창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선선한 날씨에 맞춰 가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가게엔 강아지 손님이 와 있었다. 청양고추의 매움이 아직 가시지 않아 달콤한 커피가 먹고 싶었으나 나도 모르게 좋아하는 드립커피를 선택했고, 돈가스를 먹고 난 직후라 배가 꽤 불렀지만 딱 하나 남아있던 스콘도 함께 주문했다. 하나가 남아있는 상태는 차마 거부하기가 힘들다. 작은 잼도 함께 나오겠지? 하고 기대했고 역시나 귀여운 딸기 잼이 함께 나왔다.
카페에선 주문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고양이의 새로운 캣타워를 기분 좋게 주문하고, 경주에 와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을 손으로 꾹꾹 눌러쓰며 노트에 남겼다. 고양이가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며 우리 집 애들이 보고 싶어졌다. 경주도 오랜만 여행도 오랜만 카페도 오랜만에 와서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익숙하게 늘 당연하게 받아들어던 것들이 작은 행복으로 다가왔다. 이게 행복이지, 내가 이런 것들을 좋아했지, 하며 잠시 쉬며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오래 머물 수 없는 여행자는 아쉽게도 카페를 마지막으로 하고 경주를 떠나기로 했다.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 수제 맥주를 한 잔 하고 떠나고 싶었으나 아직은 할 일이 꽤 남아있기에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폐역이 되어버린 경주역 근처로 사용하지 않는 기찻길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언젠가 이 기찻길도 사라지고 이 자리는 다른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난 이 동네 사람이 아니니 곧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거리의 이팝나무들이 지는 해의 오렌지 빛을 받아 화사한 흰색에서 차분한 아이보리색으로 물들어갔다. 여전히 풍성하게 아름다운 꽃이 이번 여행을 축하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선선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이팝나무를 바라보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짧고 단순한 이번 여행은 어쩌면 나다움이 가장 잘 묻어난 여행이 된 것 같다. 힘을 빼고 편안하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누리고자 했고, 좋은 날씨 덕에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 사소하지만 평소 만나지 못했던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자의 신분이기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반나절의 여행이 주는 경험으로 나는 꽤 큰 힘을 얻고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 또 앞으로를 잘 살아갈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