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보통 그 정도 난이도 게임은 대학생들이 커플들 만들 때 하는 거야. 서로 마음 확인할 때."
" 문상 준다니까 다들 그냥 막 하던데?"
" 야 문상 준다고 아무나 한테 막 그렇게 안기고 그러냐?"
현욱이 이상한 눈으로 내게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희경이
" 이 조선시대 인간들을 보았나? 야 남자랑 그냥 스킨십 좀 했다고 다 사귀냐? 그럼 남녀공학인 애들은 다 사귀고 결혼하냐?"
" 맞아. 그리고 같이 게임한 애는 나한테 말도 거의 없어. 그냥 웃기만 하고. 그리고 그 애 친구랑 내가 친해서 늦게까지 통화하고 그래서 그 애도 내가 난처해하니까 도와주려고...."
" 뭘 별거를 다 도와주고 그래. 그러다 정분 나겠다. "
" 네가 뭘 몰라서 그런데 진짜 설레면 그냥 옷깃만 스쳐도 가슴 두근거리고 그렇거든? 근데 친구사이는 안 그런 거잖아. 봐봐. 내가 너 어깨동무한다고 네가 가슴이 막 막 이렇게 뛰나? "
내가 현욱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현욱의 가슴은 고요했다.
" 봐봐. 이 정적. 넌 날 여자로 안 보는 거잖아. 그렇지?"
" 당연한 거 아냐? 넌 친구니까. 내 연인이 아니잖아. "
" 뭐야. 그럼 니 가슴 설레게 한 그 인간은 도대체 누군데? 응? "
내가 현욱의 목을 헤드락을 하고 흔들고, 그런 나와 현욱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던 희경 앞으로 성현오빠가 들어왔다.
그 순간.
현욱의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일순간 미친 듯 내 온몸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현욱을 바라봤고, 현욱은 급히 내 헤드락을 풀며 일어났다.
" 선배님 시험 잘 치셨어요? 오늘은 웬일이세요?"
" 아 어제 그리던 거 마저 완성하려고. 현욱이 너는 웬일이야? 이 시간에?"
" 아 전 미소랑 만나기로 해서요. "
당황해하며 나를 바라보는 현욱과 눈을 마주친 나는 현욱의 붉어진 볼을 보고 깨달았다. 아. 현욱의 가슴을 미치도록 뛰게 한 상대가 성현 선배였구나.
" 아 저 현욱이랑 만나기로 한 건 맞죠. 뭐. 음. 재료 좀 빌리려고요. 그렇지 현욱아?"
" 그렇지. 아까 뭐 빌려 달랬지? 너 아 그거 디자인 물감. 그래. 그거. "
" 수채화 전공이 디자인 물감은 왜?"
" 아 음 그게 학교에서 시화전 하는데 쓸려고요. 그렇지 희경아?"
" 나 참. 어이없어서. 놀고들 있네. 핸섬가이 난 가요. "
순간 현욱과 나는 희경을 째려봤다. 우리가 째려보는지 모르는지 희경은 큰 소리로 웃으며 데생실기실을 나갔고, 현욱은 쭈뼛거리며 이젤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 너 그림 그리고 간다고 했잖아. 같이 갈 거지?"
" 아 응."
사각사각. 연필소리가 실기실 안을 울려 퍼졌다. 아직 지난번 일 이후 선배와 이렇게 몇 안 되는 거리에서 그것도 단 3명이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계속 내가 피해 다녔고 되도록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뭐라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어색한 이 감정과 기분을 뭐라 설명을 해야 하지?'
혼자 고민 고민하고 있는데 이젤옆에 놓인 의자에 딸기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성현오빠가 서 있었다.
" 지난번 일 미안해."
" 아 그건. 제가 일방적으로 화를 낸 건데 선배께서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더 미안하죠. "
" 선배?"
" 아 오빠."
" 훗 됐어. 그거면. "
그는 내 머리를 헝클어 트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현욱을 돌아봤고 현욱의 옆자리에도 음료가 놓여 있었다.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현욱은 석고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열심히 그림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 언제부터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는 나는 현욱을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 뭘?"
" 성현오빠 좋아한 거. 설마 나만 또 모른 거야?"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현욱이 말문을 연다.
" 음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나만의 왕자님 같았어. 디자인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섬세한 손하며 친절한 웃음. 다른 곳에 눈길 한번 안주는 그 냉철함. 캬... 거기에 만찢남 같은 비주얼?"
" 아... 음.. 그렇기는 하지. 스타일도 멋지고... 차가운 듯하면서도 알고 보면 수다쟁이고 머..."
" 그래서 고백하고 싶은데 도통 기회가 없어. 쳇. "
" 진짜 고백할 거야? 성현오빠가 남자 취향이 아닐 수도 있잖아."
" 그게 중요해? 내 마음이 미칠 거 같은데. 그리고 내가 외모만 남자지 너 말대로 난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 사람이야. "
" 그건 인정. 사실 네가 나보다 더 여성스럽기는 하지. 더 얌전하고 성격도 꼼꼼하고 차분하고 한 미모하고 행동도 더 여성스럽고...."
" 또오?"
현욱은 반짝이는 눈으로 양손을 턱에 괴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보통은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평가하니까. 이렇게 다정하고 천생 여자인 현욱이 남고에 다니고 남성적인 몸을 타고 난 건 어쩌면 천운이라 어른이 되지 않고는 바뀔 수 없는 운명의 장난 아닌가.
그런 현욱이 성현오빠에게 고백해서 차이기라도 하면... 으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온 화실에 소문이 나고 둘 다 어쩌면 고개도 못 들고 다니거나 아니면 아예 둘의 얼굴조차 못 볼 테니까.
" 근데 너 진짜 고백할 거야?"
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 미소야. 있지. 사랑의 시작과 끝은 고백이라고 생각해. 진심을 담아서 그 사람의 전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의 모든 모습이 좋고 어떤 행동도 이해된다면 진짜 사랑 아닐까? 그리고 그런 모습조차 이해하고 받아주는 마음이라면 그런 마음이라면 고백해야지. 성현오빠는 내가 남자 좋아하는지 애초부터 알더라고. 그러면서 마음 안 다치게 조심하라고 하던데? 그 세심한 배려. 너무 멋지잖아. 그래서 난 차이더라도 고백하려고. 내 마음을 고백한다면 그 고백이 하늘에 닿는 다면 언젠가는 응답하지 않겠어?"
" 음. 그렇기는 한데 고백도 상대방이 이해를 아무리 해줘도 정작 본인의 마음이 있어야 받아줄 수 있는 거잖아. 상대방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안 드는데 고백을 하는 건 부담을 주는 거잖아."
" 야 너 지금 내가 남자 좋아한다고 그러는 거야? 왜 이성적인 마음이 안 들어. 좋으면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런 거지. 그게 남자든 여자든 충분히 들 수 있는 거잖아. 껍데기가 뭐가 중요해?"
" 아니 내가 말한 이성적인 감정은 방금 네가 말한 그 말이야. 네 말대로 껍데기가 안 중요하니까 서로에게 끌림이나 함께 하고 싶은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근데 정작 고백의 대상이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건 상처가 된다는 거지. "
" 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 마음은 변하는 거니까. 차일 때 차이더라도 고백해 봐야지. "
" 야. 현욱아. 너 진짜 멋지다. 용기 있네. 친구. "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가진 현욱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