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세 번째 만남

내 것이 아닌 자

by moonrightsea

" 무례하군요. 나는 당신과 볼 일이 없소."

" 그건 아닌 듯싶은데요. 무례한 건 당신이잖소. 이렇게 결혼한 여자의 일상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서 아이가 다니는 곳까지 와서 버젓이 아이가 보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아니잖소? 어디라도 좋으니 일단 가서 이야기 좀 하시죠."


그는 내 말에 잠시 운전대를 잡고 있더니 이내 차를 몰기 시작했고 제법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향한 곳은 강릉 시외지역에 위치한 한적한 요양병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차를 세운 그는 먼저 내려서 등나무가 보이는 벤치 앞으로 걸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길게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그는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요양병원 건물을 한번 올려다봤다.


" 시간이 지나도 당신의 눈빛은 변함이 없구려. "

내가 그에게 말했을 때 그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 내가 기억나는 걸 보니 전생의 연이 닿은 인연이었나 보군. "

그래. 그에게 나란 존재는 그저 그가 거느렸던 숱한 인연 중 하나였을 터.


채 20대 중반 정도를 갓지난 것 밖에 안된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행동도 그의 말투도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다시 봐도 너무나 그때와 똑같았고 그는 지금도 그의 앞에 서 있는 내가 불쑥불쑥 말을 할 때마다 높임말이 나오게 하는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까.




거만하리 만큼 당당하고 거침이 없고 말 한마디 행동하나하나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그의 모든 것은 마흔을 넘긴 내가 보기에는 한낯 치기 어린 행동으로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기색이란 느끼지 못할 만큼 용맹하고 우아하니까.

무엇이 저를 그토록 그의 나이와 맞지 않게 남다른 당당함과 고급스러움을 내 풍기도록 만드나.


" 당신이 찾아온 그 여자, 연수는 내 아내요. 당신과 어떤 인연이 닿아 당신이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지 모르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범죄란 걸 모르지 않잖소?"

내가 그에게 말하자 그는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지 모르지.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우습군. 이미 그녀와 아이까지 낳은 사이면 당연히 알 수도 있을 텐데? 그녀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 그럼 더 당신이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죠. 보통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당신 세상 사람들은 더 잘 알 테니까. 과거 연이 닿아 당신이 찾아온 것까지는 내가 그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 한발 물러나 이해하지. 그런데 말이야. "


나는 그에게 걸어가 그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 당신. 당신이 어떤 말과 어떤 것을 주더라도 당신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 아이가 그걸 증명하기도 하고. 만약 연수가 당신과 연이 닿아 당신 말대로 당신과 이어져야 했다면 당신과 이미 이어졌어야 하고 아이 또한 당신의 아이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겠어?"


그러자 그가 조소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요양병원을 한번 바라보고는 내가 잡았던 멱살을 풀었다. 그리고

" 이래서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그녀가 제 동생을 구하지 않고 나를 구하면서 선택한 건 바로 나라고. 그러니 그녀가 선택한 건 나란 말이야. 자네도 자네 가정도 아니고 바로 나. 정 궁금하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던가. "


'연수가 우리를 버리고 그를 선택했다고? 말도 안 돼. 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도대체 그녀에게 동생은 또 뭐야.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가 미쳐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를 부여잡자, 그는 차로 향해 걸어갔다.




" 저기 있는 그 여자. 그 여자가 그걸 증명하지.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짓을 해왔는지도. "

그는 그렇게 발길을 옮기다 요양병원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 도대체 무슨 말이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 거지?'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자 정영은 잠이 들어 있었고 연수는 베란다 밖으로 나를 바라보다 어느새 침대로 파고들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씻고 나와서 그녀에게 어떤 것을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물끄러미 등을 돌려 누운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나는 연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이야기 좀 해. "

그러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고 일어나 앉았다가 거실로 나가 물을 한잔 마시고 식탁에 다시 앉았다.


" 연수야. 상황은 설명할 수 있잖아. 뭐라 말이라도 설명이라도 좀 해봐. 내가 이해가 되게끔."

"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당신이 이해하기에는 이 일이 너무 엃혀 있어서 말이야. "


" 그래도 뭐라도 좀 이야기해봐. 도대체 언제 그를 다시 만난 거야?"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목구멍에서 툭 튀어나며 그녀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하자,


" 주어진 운명이란 게 그렇네.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것도 있는 건가... 하아~."

" 운... 명?"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돌려 베란다 창문을 바라봤다.



그와의 세 번째 만남.


그를 만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쓰고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누굴 만나든 어떤 일을 하든 그냥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소식처럼 마치 TV연애면을 보듯 그렇게 신문지 넘기듯 그의 일상을 넘겨 왔다.

수천 년간 반복되어 온 그와의 질기디 질긴 인연. 그 끝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에게 마음을 열기로 애초에 마음을 먹었다. 나를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존재.

세상에 그런 존재가 부모보다 때론 더한 그런 존재가 쉬 나타나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힘듦을 알지만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게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억수같이 비가 퍼 붙던 날.

머릿속에 선명이 들린 외침.

" 언니! 미안!"


그녀의 외침에 나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녀에게 향했고 그곳에는 세희가 전복된 차량에 거꾸로 매달린 채 애타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 미안해. 언니. 내가 그랬어. 나만 아니면 된다고. 하지만 저 사람은 아냐. 그냥 저 사람을 살려줘. 내가 언니의 운명을 받을 테니. 제발. 저 사람을 살려줘. 그게 언니를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


그녀가 말한 그.

오랜 세월 나와 끊임없이 인연이 이어져 오던 그 사람. 태호.





긴 세월을 지내며 우리 집안의 천기를 내가 대물림 받아 온 이유도 우리 집안의 누군가 대신해야 할 업보를 내가 대신한 것은 이 아이 세희의 운명을 그 소용돌이에 밀어 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만은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사랑받고 사랑하며 누군가의 인연이 되어 행복한 여생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녀는 그 긴 세월을 돌아 결국에는 그를 찾아내서 기어이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그리고 그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다니. 하늘도 무심하셔라.


하지만 이 순간도 하늘은 잔인하리 만큼 잔인하도록 그녀에게 나에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했다.

내가 그녀를 살리려 들면 아마도 그녀는 원혼이 되어 다시 수많은 업보를 치러야 겨우 환생을 하고 내가 그를 선택하면 그녀는 아마도 내가 그렇게 힘들게 내 대에서 끊어낸 운명을 그녀가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

그녀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대로 세희가 우리 집안의 운명을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


이제 정영이 첫 돌이 곧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기간만 버티면 내 대에서 내게 주어진 업보가 끝이 날 텐데... 하늘이 나를 대신해 선택한 게 그녀라니 그런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고민에 사로 잡힌 사이 맞은편 차선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이쪽으로 건너오며 라이터에 불을 붙여 차로 던졌고 차량은 이내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더는 지체 없이 그를 감싸 안은 채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세희는 활활 타오르는 차 앞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검은 그림자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 돈에 눈이 뒤집힌 것들. "




그녀의 말에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휙 하고 그녀의 손아귀에 당겨져 그녀에게 딸려 갔고 나는 미친 듯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 검은 그림자를 떼어 내었다.


그러자 그 검은 그림자가 그녀에게 칭칭 감기며

" 어디 보자. 이 맛있는 신선한 것을 보았나. 아직 채 피도 마르지 않은 신기로구나. 흠냥."


그러면서 그녀의 팔과 다리를 감아 돌며 그녀의 얼굴을 개걸스레 핥았다.

나는 푸른 불꽃을 내며 화르르 타올랐고 그런 내 모습에 놀란 검은 그림자가

" 이건 또 뭐야? 어디서...?"


말도 채 끝나기 전에 나는 그 검은 그림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서는 빠르게 분열시켜 버렸다. 내 손바닥에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 그 피가 바닥에 떨어지자 이쪽으로 다가오다 상황을 본 검은 그림자 하나가 놀라며 혼비백산하여 바닥을 뒹군 뒤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세라 그의 어깨 위로 올라타서는 그의 두 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가 두 손으로 내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며

" 자자잘 못했어요. 제발.... 이대로는 안돼!"


그의 말이 채 끝이 나기 전에 그는 내 푸른 불꽃에 가루가 되어 연기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세희를 바라봤다. 바닥에 쓰러지듯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세희는

" 결국에는 우리 둘을 살리려던 거였어? 아니면 그를 살리려던 거였나?"


" 난 네가 원혼이 되는 것을 막으려던 것뿐이야."


" 차라리 저렇게 되도록 두지 그랬어. 그랬다면 그의 곁에서 맴돌며 계속 저런 인간의 잡귀 따위 들러붙으면 내가 다 먹어치워 버렸을 텐데. "




" 그래서 네가 악귀가 되도록? 그래서 네가 망가지고 결국에는 그도 악귀가 되도록? 그럴 수 없는 운명이란 걸 잘 알잖아?"

" 그럼 언니한테 주어진 운명을 거부 말았어야지. 왜! 왜! 왜 내게 오도록 둔 거야?"


" 선택은 네가 한 거잖아. 네가 부른 거잖아. 너도 어쩔 수 없어서 나를 부른 거잖아. 그를 살리려고! "

" 그래. 맞아. 언니만이 그를 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쩌지? 언니는 그를 살린 것뿐만 아니라 "


그렇게 말하며 세희는 내 뒤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 나를 깨웠지. 당신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다 기억이 났어. 내가 왜 그렇게 세희에게 집착하고 곁에 두려 했는지. 그리고 그런 세희를 곁에 두고도 내가 그렇게 기억하려 애쓰며 그리워한 사람이 누군지도."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분명 내가 살린 그를 멀지 감치 떨어 뜨려 뒀고 그에게 키스까지 했는데...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그는 어느새 다가와 내 등 뒤에 서서 세희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와 눈이 마주친 세희는 이내 눈물을 흘렸다.


이때 들려온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교차로 맞은편 차선에 서 있던 차는 맞은편에서 달려든 트럭으로 엉망이 된 뒤였고 119 차량과 경찰차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웅성거리며 경찰이 그쪽의 사건을 수습하고 몇몇은 차량을 통제하며 서둘러 소방관들이 이쪽으로 건너오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내가 세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차량 안 그녀의 몸으로 들어가며 내게 말했다.

" 이제 한동안은 언니의 업보가 내게 곧 올 거야. 그전까지는 고생해. 붉은 달이 뜨면 알게 될 거야. 누가 배신자인지. "


나는 서둘러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고 내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던 그는 몸으로 빨려 들어가며 외쳤다.

" 기억하고 있어. 나 반드시 너를 찾아갈 거야.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절대!"




" 너를 찾아 몇 겹의 생을 돌아왔다. "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이렇게 그의 기운이 가까이서 느껴진 적이 없어 나도 모르게 교차로 건널목에서 문득 발길을 멈춘 채 건널목 너머를 바라보자 차가 멈추더니 그가 내게로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고 그는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채 고민할 틈도 없이 시간을 멈춰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기력해지려는 순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을 멈춰 버리는 일. 주변은 온통 고요했고 모든 사람들은 일 순간 그 자리에 돌이 되어 멈춰버렸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내게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그에게 먹혀들지 않는 나의 능력.

세희에게 옮겨간 나의 업보로 인하여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은 이 정도 인가.


연신 내게 키스를 퍼붓던 그는

"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어.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는데."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생각난 곳은 그의 집.

그 순간 몸은 이동하여 그의 집 소파 앞에 있었다.


그는 그 순간 나를 다시 끌어당겨 강렬히 키스를 퍼부었다. 내 얼굴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한 손은 내 허리를 감싼 채. 마치 내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발버둥을 치듯 강렬한 그의 애타는 마음을 내게 보여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밀쳐내며,

" 뭐 하는 짓이에요?"




그는 이내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거실 한켠에 마련된 스탠드바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스탠드 바 위에 올려둔 위스키를 부어 한잔을 마시고는 내게 다시 다가왔다.

" 세희가 꽤나 정교하게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놨더군. "


' 세희는 그럴 능력이 없는데... 무슨 말이지? '


" 우리 둘이 만난 건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날 내가 당신을 구한 건 세희 때문이었다고요. 당신을 구해야 세희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

" 그래. 그렇지. 그래야 세희가 가져간 네 운명을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애초에 넌 내 것이야 하는 운명이었으니까."


" 당신이 잘못 알고 있나 본데 난 당신의 소유도 아니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야. 그냥 나는 주어진 업보를 행할 뿐이라고."

나는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 그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지. 당신 집안의 운명은 당신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핏줄로 한 명에게 주어진 업보. 그걸 물려받는 사람이 책임과 소명을 다하면 그뿐인걸. 세희는 애초에 그 비상한 머리로 알고 있었던 거고 당신은 그 착한 마음으로 애써 외면해 왔던 거고. "


그러며 그는 이내 위스키 잔에 다시 술을 부어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옆에 소파에 앉아 내 무릎과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 애초에 운명은 우리였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




나는 그런 그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핑 도는 머리에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 그건 당신의 착각이죠. 당신과 나는 만나면 안 되는 운명. 내가 당신을 선택하면 당신의 가문은 씨가 마르는 상황이었고 당신의 천운도 내 기에 눌려 기운이 쇠한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


" 그랬지. 예전의 세상은 그랬었지. 하지만 아주 조금씩 세상이 변해왔잖아. 그렇게 내 마음을 못 얻어서 안달이 났던 세희가 그 숱한 세월을 돌아 어느새 내게 다가와 내 마음을 얻었듯이 당신이 사람이 되었듯이 말이야. 우리가 몰랐던 그 숱한 시간 동안 우리도 달라져 있잖아? 이제는 아무도 우리가 대를 물려받든 받지 않든 집안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 거라고. 오로지 우리 인생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거지. "


그러며 그는 내 앞에 놓인 잔을 치고는 다시 이내 남은 술을 들이켰다.


내가 머리를 움켜쥐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흔들렸고 나는 이내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며 그의 품에 안겼다.


' 정영아!'

애타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부르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키자 침대 위.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의 팔을 등아래 둔 채 그렇게 누워있었다. 그도 이미 벌거벗은 채 내 곁에서 잠들어 있는 상황.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할지 도통 감이 안 왔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그 집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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