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부르는 본능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마치 꿈을 꾸듯 이어진 순간들. 정지화면처럼 머릿속에 번쩍번쩍 떠오르며 내 기억에 치고 오르는 것들.
나를 안아 든 그의 거친 팔뚝. 그리고 내 옷깃을 스치는 그의 떨리던 손길.
문득 떠오른 장면.
아슬아슬 그의 주변을 돌며 하얀 무명치맛자락을 나부끼며 그렇게 그의 주변에서 춤을 추던 모습.
그 순간 그가 손을 들어 내 치맛자락을 만졌고 그의 손바닥 위로 내 치맛자락이 스스륵 미끄러지며 그를 스치듯 지나간 장면. 그렇게 돌아서 다시 그 옆의 장수 곁으로 돌아갈 때 아련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던 그의 시선.
그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들어 내 팔을 타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보며 춤을 이어갔던 장면. 그렇게 빙글빙글 돌며 그를 지나칠 때마다 그의 손은 아슬아슬 내 치맛자락을 매만졌고 그 손길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 설레어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킬세라 더 춤사위는 격하게 이어졌고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치지 않게 무대 중앙에 세희를 바라보며 그렇게 애써 시선을 외면해 갔다.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이 멈추고 잠깐 곁에 있던 장수에게 술잔을 건넸을 때,
"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분이 멋진 무희라니 너무 감격스럽군요. "
그렇게 말하는 장수를 무심히 나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 무희라고 다 같은 무희는 아니지요. 가끔은 탐하면 안 되는 것도 있는 법."
그러며 그에게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게 끔 한 뒤 그 자리를 벗어났던 기억.
그리고 다시 느껴지는 그의 손길.
내 속살을 파고들며 나를 어루만지며 강렬히 키스를 퍼붓는 그의 손.
내 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그의 욕망 가득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오르던 순간.
'내가 그를 진정 원하고 있었던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기차는 역에 당도해 있었다.
' 그래서 그 순간을 잊으려 내가 기억에서 지운 것인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내게 먹인 게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강력한 무엇보다 그의 손길이 그것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잠들었던 그를 향한 욕망.
수천 년을 애타게 그를 그리워하고 그와 함께 하길 원했던 그 욕망.
내가 애써 외면하며 잠재우려 했던 그 욕망을 나는 그 약기운에 취해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그의 손길에 그의 욕망 어린 몸놀림에 의지한 채 그가 하려는 대로 두었다는 것.
너무나 무서운 인간이 가진 탐욕이라는 욕망.
들여다보면 추하디 추한 것. 탐욕.
인간만이 가진 그 욕망들로 인하여 세상이 발전하고 변해 가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 욕망을 내가 피해왔기에 이렇게 나는 하늘이 준 업보를 수없는 시간 동안 행해 왔는데 세희를 만나고 정영의 돌이 지나자 내게 그런 능력이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에 나는 고서부터 현대까지 전해진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내용, 사상 정치, 경제 그리고 탐욕에 해당되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갔다.
그리고 그런 와 중에 나 스스로에게 목표를 심어주어 그런 탐욕이 자연스레 내 생의 발전 동기가 되도록 다시 전문 자격증을 따고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구한 일터. 점점 일에 빠져들고 일생활에 빠져 들며 나는 내가 가진 탐욕이 무엇인지 까마득히 잊어버릴 때쯤. 다시 그를 마주한 것이다.
그는 내게 찾아들었고 내가 외면하고자 했던 그를 향했던 욕망이 꿈틀대는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흐트러 뜨렸다.
그가 우리 집 앞에서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나를 불러 세웠을 때,
" 당신에게는 세희가 있잖아. 왜 나까지 이토록 탐하려는 거야?"
" 그건 당신이 아니잖아. 세희는 세희일 뿐이지.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사라지고 도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이제는 내 여자 같지도 않아. 이 세상 사람 같지도 않다고. "
" 그건 니들이 자초한 거잖아. 당신을 살리겠다고 내 업보를 세희가 떠 안아 그렇게 된 거고 당신의 목숨을 구한 대가니 당신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인 거야."
"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지. 그녀가 아니라고. 이제야 그걸 알게 되었는데 섣불리 내 마음을 돌리려 하지 마.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와 어느새 키스를 하려 드는 그.
나는 그가 잡은 내 턱을 돌리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 순간 어느새 곁에 다가온 정우,
문득 정우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안도감과 함께.
" 당신 왜 나왔어. 전화라도 하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정우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휑하니 등을 돌리며
" 이번 생은 내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해. 다시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억해."
그렇게 말하며 돌아가 버렸다.
문득 나는 왜 세희가 이런 그를 재지 하지 않는지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라면 그를 그렇게 간절히 원한 그녀라면 충분히 우리 앞에 나타나거나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덤벼대는 그를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텐데.
한낯 인간이 되어 버린 내게 세희를 찾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세희와 관련된 어떤 내용도 실마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의 소식을 알려면 그가 준 명함. 전화 한 통이면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나는 전화를 걸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인연이 닿아 이렇게 만나게 된 것조차 나는 거부하고 싶은데 세희와 더 엃히게 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어이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아닌 누구도 세희의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 내가 그쪽으로 갈게. "
회사에 반차를 쓰고 나와 그를 만나 카페로 향했고 나는 자리에 앉자 말자 그에게 물었다.
" 세희는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당신이 이렇게 하도록 그냥 두는 거지?"
" 그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인하지 않아. 그렇게 타고 난 아이도 아니고. "
" 그럼 당신도 어떤 능력을 타고 난 거야? 세희가 보는 것을 같이 보는 능력?"
" 나? 나는 욕망을 보는 능력을 타고났지. 내가 그 숱한 세월 동안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부를 쥘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내 능력 덕분이고 그 덕에 세희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지. 나를 갖고자 하는 그 이글거리는 눈빛. 그리고 네 안에 숨겨져 있던 나를 향한 마음도."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뻣어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내 곁에 앉아서 내 어깨를 그에게 당긴 뒤 내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나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 그래. 네 눈으로 확인하면 더 잘 알겠네. 그녀의 말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이끌어 차에 태우고는 강릉시외 한적한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곳 4층 제일 구석에 자리 잡은 병실 안 침대에 멍하니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고 앉은 그녀. 세희.
나는 밀려드는 후회와 눈물로 뒤엉켜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 미안해.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구나. 미안."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세희는 나를 보며 이내 방긋 웃었다.
" 언니는 참 무서운 사람이구나. 그 숱한 일들을 겪으며 어떻게 나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은 거야?"
" 세희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 사람을 구하는 일이. 그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그저 말처럼 그리 쉽게 되는 줄 알았다면 나는 고민도 안 했겠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다음 내게 주어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네."
"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런데 말이야. 언니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겪어오면서도 그렇게 멀쩡했을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은 내 머릿속에 전광석처럼 이것들이 나를 치고 지나가는데 숱하게 고민이 드는데 말이야. 내가 저들을 살림으로써 저들의 인생은 나아질까. 그들은 과연 그들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한 선택이 현명한가. 숱하게 온갖 생각들이 사로잡는데... 내가 내 손으로 거둬들인 그 많은 악귀들을 그 악한 마음들을 어떻게 씻어내며 지낼 수 있는 거지? 맨 정신으로? 이렇게 미칠 것만 같은데 말이야. "
나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런 숱한 날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그게 일상이 되어 내가 내리는 판단의 기준이 생겨. 그리고 그 순간의 선택으로 인하여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되지. 하지만 그만큼 마음은 비어가. 인간이 아니니까. "
그러자 그녀는 분노의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 그건 언니가 애초에 인간이 되지 않았을 때부터 느껴왔으니 그렇지만 난 달라. 난 적어도 언니에게 업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사람이었다고. 저기 저 사람을 미치도록 그리워하며 사랑하며 함께 했던 사람. "
그렇게 말하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고개를 떨구고는
"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 그에게 보였던 그 간절한 애틋함이 이제는 더 이상 안 보인다고. 그저 나를 바라보는 경멸의 눈빛과 증오의 눈빛. 욕망의 눈빛만이 느껴져. 그래서 미칠 것만 같아. "
그러자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 난 당신을 경멸한 적도 없고 밀어낸 적도 없어. 그런 마음이 든 건 오로지 당신의 욕망이었잖아. 그럼 그때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 내가 어떻게 당신을... 얼마 만에 당신을 얻은 건데 어떻게 그래. 내 행복을 내 희망을... 흑흑."
그녀는 그렇게 흐느끼며 침대로 다시 파고들었다.
" 이제는 내게 당신의 존재는 필요 없어. 생명을 구하는 일 따위도. 그 외침들도 듣고 싶지 않아. 어딘가서 밤늦게 들려오는 비명 따위 그냥 악몽 같아. "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힘들면 내려놓으면 돼. 그들의 목소리로 네가 잠식당하고 죽을 거 같으면 그냥 귀를 닫아버리면 돼. 세상 그 무엇보다 네가 소중하니까. "
그녀는 이불 깊숙이 파고들며 말했다.
" 거짓말쟁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려 든 거면서."
나는 그녀의 이불을 더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 위로 올려 주며 말했다.
" 네가 놓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오로지 희망. 그 희망이 일으키는 기적. 그 누구도 네게 욕할 사람은 없어. 넌 이미 세상을 한번 구했으니까. 저 사람을 살림으로써. 그리고 그를 살리고 내게서 지칠 대로 지쳐 버렸던 내게서 내 업보를 가져감으로써. 너는 나와 저 사람의 세상을 구한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네 할 일을 했어. "
" 언니... 나 나도 잘 모르겠어. 잘하고 있는지. "
이불을 뒤집어쓴 그녀가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 내려놔도 된다니까. 네 두 발로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 때쯤. 그때는 세상을 발아래 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너를 통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진심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찾아. 진정 네가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으로 간절히 채워봐. "
" 그녀를 사랑하긴 했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 미친 듯 사랑했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내게 과외를 하러 왔을 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고백했으니까. 그런 그녀와 도피로 떠난 유학생활에서도 그녀는 내게 너무나 소중했고 그녀가 내게 온 건 운명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깊어지고 그 마음을 확인하면 할수록 더 분명한 게 있더군. 그녀의 뒤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마음. 어디선가 나를 찾는 간절한 욕망."
그는 내 손을 잡아서 운전석 옆 보조대에 올리며 그 위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 비록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난 본능적으로 느껴졌지. 그녀와 같은 듯 다른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 나를 강하게 이끌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내 몸을 돌린 뒤 그를 응시하게 했다.
" 당신이 겉으로 부인하려 들어도 당신은 이미 나를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잖아. 애써 외면하려 해 온 거지. 그 마음이 세희의 행동으로 인해 내게 명확하게 전달된 순간부터. 나는 꽤나 고민을 했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신을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당신을 데려와야 할지. "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당신이 욕망을 보는 눈이 있었다면 더 잘 알았겠네. 내 안에 든 욕망 모성애. 그 강한 기운이 얼마나 단단히 우리를 감싸고 있었는지를. "
" 그래 그 말도 안 되는 기운으로 당신을 찾는데 애를 좀 먹었지. 가끔은 그 기운이 나를 아주 혼란스럽게 했거든. 마치 내가 아닌 다른 타인에게 느끼는 강한 욕망처럼 느껴지는 그것.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정도로 강력한 무엇인가.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앞을 보며 차를 몰기 시작했다.
" 하지만 말이야. 당신이 만약에 나와의 사이에도 그런 존재가 생기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럼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 텐데 말이야.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당신이 원하는 대로 두게 하지 않을 거야. 내 몸은 내가 지킬 거니까. 당신에게 가는 일 따위는 없어. "
" 후훗. 글쎄. 그게 생각처럼 쉽다면야 나도 이렇게 당신을 애달프게 쫓아다니지 않겠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하필 나지? 그에게 그 많은 재물과 숱한 돈과 권력이 있는데 왜 하필 볼품없고 가진 것도 없는 나를 그는 탐하는가.
"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당신 정도 능력이면 나보다 더 예쁘고 더 잘난 여자들이 주변에 차고도 넘치는데 왜 하필 과거 인연 운운하며 나에게 이러는 거야? 당신에게 관심도 없는 나를."
그러자 그가 차를 급히 공터 곁에 세웠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강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내가 말했잖아. 난 욕망을 보는 눈을 가졌다고. 그 눈에 반응하며 갖고자 하는 것을 얻으며 지내왔다고. 봐. 내 손. 이 젖은 손끝이 그걸 증명하지. 네 입술 이렇게 파르르 떨리며 긴장한 네 입술이 내게 말하잖아. 네가 아무리 강하게 부인해도 이번 생에 너는 내 것이야 한다고. 네 그 강한 의지와 상관없이 네 온몸은 증명하고 있어. 네가 나한테 와야지만 내 남은 욕망의 끝이 정점을 찍거든. "
나는 그를 거칠게 뿌리치고 그의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미칠 듯 저주하고 싶은 인간의 몸뚱이.
생각처럼 통제도 되지 않고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이런 몸뚱이 따위. 한낯 과거의 그 사무치는 그리움에 찌들어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몸뚱이 따위. 내 마음과 달리 그에게 달려가 그에게 매달리려 드는 그 탐욕의 그늘 따위.
겨우 부인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렇게 당면한 일들을 뿌리치고 그곳을 외면하며 벗어나는 게 겨우 다인...
그것마저도 그 순간마저도 나는 느껴지고 있었다.
가슴 가득 두근거리는 미쳐버린 내 심장의 요동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 정영과 정우의 얼굴을.
무엇이 이리도 나를 궁지로 위험으로 내몰고 있는 것인가.
그후로 그는 매일같이 나를 찾아 왔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내가 일이 끝날 때 맞춰 찾아오거나 내가 정영을 데리러 갈 때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매번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를 이끌고 데려가 달래기도 하고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내서 그를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그에게 분명 말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내 아이를 위해 그에게 가는 일따위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도통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더 강력하게 나를 끌어 안고 내게 키스를 퍼붓거나 거침없이 나를 매만졌다.
매번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돌아서기 바빴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이 너무나 화가 났지만 더 이해 안되는 것은 매번 그런 그의 행동이 예측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내가 원한다면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그에게 접근 금지 명령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분명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내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그럴수록 그에게 더 모질게 말했다.
" 내 근처에 다시는 나타나지마. 당신 따위 난 원한 적 없으니까. "
" 후훗. 그래. 말은 그렇게 해야지. 그래야 되는게 순리니까. "
하지만 그런 내 말과 달리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거칠어지며 파르르 떨었다. 이 떨림이 어떤 두려움인지 나는 구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놓치는 무엇인가가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싶지도 않았다.
어디서 부터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는 마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인가.
탐욕이 자라나 나를 잠식해 가는 동안 눈앞이 가려져 아무것도 안보이려 드는 순간을 그는 매우 잘 이용하면서 나를 있는대로 가지고 노는 느낌마저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게 그가 말한 그의 능력인가.
어느순간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가 오는 시간을 피해 정영의 하원시간을 조절하고 나는 더 일찍 퇴근을 하며 그와 마주치는 시간을 최대한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영의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받았다. 주변의 학부모들이 정영이와 친구들을 같이 놀지 않았으면 한다는 민원을 제기하였다는 말을 상담을 통해 들었다. 담임은 말했다.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잘 알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