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를 어떻게 만난 거냐고 물었을 때 내가 과거의 연을 제대로 설명했다면 이런 질문의 답변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정우는 아무 말 못 하는 내게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볼을 쓸어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정우의 손.
안타깝고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의 손길에 나는 볼을 문질렀다.
그는 거칠게 내 두 볼을 당겨 키스를 했다. 그런 그의 입맞춤에 나는 가만히 그에게 기대어 그의 거친 숨결을 느꼈다.
태호와 다른 그의 숨결.
부드럽고 포근히 나를 감싸는 그의 숨결은 내게 생기를 불어넣고 내 마음을 안정시킨다. 불안한 듯 흔들렸던 내 마음이 어느새 고요해지며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정우가 내게 주는 이 안정감.
이 마음에 나는 인간이 될 결심을 했다. 그가 주는 따스한 인간미는 그가 내게 보여준 이 마음은 내가 살아온 그 어떤 생애도 느낄 수 없던 마음이었기에 그의 흔들리던 눈빛에 그의 마음에 내 마음이 동하였는지 모른다.
그가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때로는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의 손길에 전혀 두려움이라고는 느끼지 않고 몸을 맡기고 그에게 기댈 수 있었다. 언제나 그는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고 그와의 잠자리는 나를 깊게 잠들게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었고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태호와 마주한 순간은 달랐다.
언제나 긴장되고 두근대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순간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마치 내 귓가에 전해지듯 울려 퍼지고 그의 곁에만 다가가도 내 심장 소리는 요동치고 숨결은 거칠어지고 손끝은 떨려왔다.
사람들은 이걸 사랑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힘처럼 느껴졌다.
그의 앞에만 서면 그를 향한 마음은 몇 배로 커지면서 욕망에 탐욕에 잠식을 당하고 그를 갖고자 하는 마음만이 남아 그에게 온통 매료되어 버리는 마음. 무엇이 이토록 그를 탐하게 만드는지 모르지만 이런 마음은 비단 여자인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에게 항상 책략을 말하던 책사도 그의 앞에서는 연신 침을 삼켜가며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설명하기 바빴고 그의 곁에 장수들은 목소리를 더해 그에게 설명을 하며 언성을 높여가며 그를 추대하기 바빴다.
그는 묘하게 사람의 감정을 더 흥분시키고 그들의 욕구를 끌어올리는 힘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의 힘이 모여 세력을 이루고 권력이 되어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내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내 곁에서 멀리 떨쳐낼 시간. 그에게서 보다 떨어져 그의 행동을 그의 몸짓을 자연스럽게 거부하며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나 스스로를 통제할 마음을 수양할 시간.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가 지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그 지식을 활용하여 그것을 키우고자 마음을 먹었고 그리하려 애를 써왔지만 본능은 수만 세기를 거쳐 인간이 생존하도록 만들어진 몸에 새겨진 문신과도 같은 것.
그리고 그 문신의 해독법을 아는 자를 맞닥 드린 내게 한낯 고작 몇 천년의 기록으로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을 그 짧은 시간에 익히기란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그렇게 그와 관계를 가지고 내가 옷을 입으며
" 내가 흔들리기라도 했으면..."
내가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정우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옷도 채 다 입지 않은 나를 뒤에서 포근히 감싸 안고 그는 나를 돌려 누이며 눈을 마주쳤다.
"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그때 그와의 인연이 당신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지. 나도 알고 있고 그리고 그 숱한 시간을 돌아 그가 기억을 해내고 다시 당신을 찾겠다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니지. 아마도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 곁에 있다는 게 그게 진실이고 현실이니까.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게 맞아. 당신은 그래왔으니까. "
정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팔베개를 한 손은 그대로 둔 채 한 손을 들어 이마로 가져다 대고는 천천히 말했다.
" 다만 나도 한낯 인간이다 보니 미친 듯 그 자식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내 가정을 깨는 그 자식을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고.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후훗. 그럼 안된다는 걸 당신이 내 곁에서 보여줘 왔으니. 그게 얼마나 힘들고 잔인한 짓인지. 세상에 그것 말고도 얼마나 아름답고 지켜나가며 보고 살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은 이어지고 또 살아진다는 것도. 때로는 놓을 마음도 있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도 있다는 것도. "
그렇게 말하는 정우의 두 볼에 눈물이 흘렀다.
이 남자의 마음은 뭘까. 어디까지 나를 받아들이고 포용할 생각인 건가. 이 사람의 진심과 사랑의 끝은 어딜까.
"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이 인간이 된 이상 겪게 되는 시련이고 그걸 겪어 만든 장본인이 나란 인간이니 나는 정영과 기다릴 거야. 당신이 어떤 모습이던 어떤 미래로 우리에게 다가오든.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거든. 그러니 우리 걱정은 접어둬.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해. 당신이 인간으로 겪어야 하는 마음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면 우리가 막는다고 되는 것도 아닌 걸 이미 아니까. 고작 인간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런 당신을 받아주고 용서해 줄 수밖에 없는 거란 게 사실이란 것도 아니까. "
" 부디 당신의 그 마음이 진심이었으면 좋겠어. "
나는 일어나 옷을 입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울행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메일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서울에 숙소도 잡았다.
나는 왜 그 순간 그의 말에 그토록 매정하게 돌아섰을까.
나는 왜 인간의 그 순애보와 같은 그 진솔한 마음에 진심을 외면하였나. 그가 말한 것이 진심이라도 나는 신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려 들었나.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이 길을 나선 것인가.
내가 그토록 외면하고자 하였던 나의 욕망. 인간의 탐욕들. 그 소용돌이에 나는 거침없이 뛰어들어 발길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왜 무엇을 증명하려 그 욕망을 이겨내려는 한 낯 인간의 마지막 남은 희망인 그 순애보, 연민마저 외면하려 드는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는 법원으로 가서 이혼서류를 적어 그에게 우편으로 보낸 뒤 다시 근처에 열리는 직업 박람회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중소기업에 비서직으로 바로 채용이 되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은 대로 은행에 들러 모아두었던 현금 일부를 가지고 월세 집을 구했다.
보증금 500에 월 50만 원. 원래라면 보증금 2천만 원인 곳인데 주인은 급히 내놓은 곳이라며 내게 보증금을 깎아주는 대신 월세를 10만 원 올려 받기로 하고 계약을 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가 인간으로 살아오며 터울 삼아 자리 잡았던 곳을 벗어나 처음으로 나 혼자만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나온 곳. 치열한 전쟁터 같은 그곳 서울. 그렇게 나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어진 울타리를 벗어난 삶.
그 삶은 고단함과 힘듬의 연속이다. 연일이 이어지는 야근에 사장의 잔소리에 밀려드는 업무에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향하면 냉장고 속은 텅 비어 있었고 나는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며 책을 봤다. 그러다 잠이 들면 일어나 다시 출근을 하고 그렇게 지속된 생활이 벌써 10개월. 어느새 해는 바뀌고 정영이 학교에 갈 무렵.
문득 머릿속에 정영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잠들 때마다 눈물로 지새운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꿈을 꾸면 정영은 다정히 다가와 내 품에 안기며
" 엄마 보고 싶어요. 정영이 보러 와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으며 내게 그림일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손을 이끌고 근처 호수로 가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산책하며 걸었던 호수, 에디슨 박물관. 근처 놀이터 약수터... 그 많은 곳을 정영은 밤마다 내 곁에 찾아들어 나를 이끌고 다녔고 잠에서 깨면 그렇게 배겟보가 눈물로 젖어 있기 일 수.
달력을 보니 어느새 내일이면 입학식 날이었다.
나는 회사에 월차를 내고 다시 강릉행 KTX에 몸을 실었다.
아무 말없이 집에 들어서자 정영이
" 엄마다. 엄마~"
라고 말하며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훔쳤다.
" 엄마 공부하느라 힘들었죠? 정영이 잘 참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헤헤."
" 당신 고생 많았어. 오느라 고생했지? 아직 저녁 먹기 전인데 늦었지만 같이 먹어. "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반. 평소 같으면 저녁 식사도 끝내고 설거지도 다하고 정영이 숙제를 할 시간인데 아직도 저녁을 안 먹었다니.
" 내가 오늘 엄마 온다고 조금 늦게 밥 먹자고 했어요. 아버지께. "
" 기다려 줘서 고마워. 정영아. "
그렇게 말하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정영은 그간 못 본 사이 부쩍 자라 있었고 말도 제법 많아졌었다. 그간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며 새로 사귄 친구들 이야기, 2학기에 시작했던 방과 후 수업 등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며 밥도 채 삼키지 않고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보다 못한 정우가
" 정영아. 엄마 밥 좀 먹자. 너도 그만 말하고 밥은 마저 먹고 이야기해야지."
" 아... 네. "
그렇게 대답을 하고 이내 또 한 숟가락을 뜨다 또 못내 아쉬웠는지 이야기를 연신해 댔다.
나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정영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같이 호수로 산책을 나갔다. 정영이 신이 나 앞으로 달려 나가자,
" 서울은 지낼 만해?"
" 뭐 일 회사 집이 전부지 뭐. 정영이는 별로 걱정 안 한 것 같던데 이야기를 잘했는가 보네."
" 찾기야 많이 찾았지. 그래도 당신이 공부하러 서울 갔다니까. 금세 어른 스럽게 받아들이고는 의젓하게 제 할 일 잘하더라고. 어린 녀석이 철이 다 들었어. "
" 나 원망 안 해? 그러고 나가서?"
" 원망은 무슨...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 그 사람은... 만난 거야?"
" 아니. 그러지 않으려고 나간 건데. 왜."
" 아 아냐. 그럴 거라 생각했어. 여기 있으면 더 힘들었을 테니까. "
" 언젠가는 또 찾아오겠지. 그건 그때 봐서 결정하려고."
" 당신 정말 이혼할 생각이었던 거야?"
길을 가다 정우는 나를 보며 물었다.
" 당신이 나한테만 메여 살 필요는 없잖아. 괜한 오해받으면서."
" 뭐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 안 해. 근데 난 단지. 당신이 이혼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아는지 궁금해서 그래."
" 음. 의미라..."
그때 앞에 달려 나갔던 정영이 달려왔다. 그리고 우리 손을 이끌어 솜사탕을 파는 곳으로 향했다.
" 저거 진짜 이쁘지 않아요? 모양이 꼭 곰돌이 같이 생겼어요. 진짜 멋져요. 헤헤."
" 알았다. 이번에는 아빠가 사줄게. 내일 좋은 일도 있고 하니 기념으로 "
" 아싸 감사합니다. "
" 내일 당신이 갈 거야? 학교?"
" 음 생각해 보고. 당신은 안 가요?"
" 나 야간 근무 끝나고 바로 갈게. 먼저 가서 기다릴래?"
" 당신이 갈 거면 나까지 갈 필요 있을까? 이렇게 얼굴 보면 된 거지."
그러자 앞에 가며 솜사탕을 먹던 정영이 돌아보며
" 엄마도 같이 가요. 네?"
나는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교정. 3월 교정은 어느새 새싹이 돋아나 파릇파릇 입학한 아이들을 반기며 그렇게 탐스럽게 새순이 돋아나 있었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으로 향해 모여든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로 교장선생님은 훈화말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 아 맞네. 정영엄마. 그때 바람나서 나갔다던..."
" 그래도 애 학교입학식에도 왔네? 뻔뻔하게? "
" 어머 듣겠어. 쉿 조용히 좀 말해."
숙덕거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 어느새 뒤에서 내 곁에 다가온 정우는 내 어깨를 감싸며,
" 다행히 내가 시간을 잘 맞췄네. 늦어서 미안. 근무가 방금 끝나서. 자기 오늘은 근무는 안 하지? 그럼 같이 저녁 먹고 가."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말했다.
' 저런 사람들 말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질투해서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내 볼에 입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민망한 듯 옆으로 한발 물러나 서서는 연신 우리를 바라봤다. 그런 그들을 의식이나 한 듯 정우는 나를 돌려세우며,
" 정영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나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오자. 오붓이 데이트도 하고. 남의 집 사정 따위 일일이 신경 쓰는 말 따위는 귀담아 두지 말고. 응?"
그러며 나를 이끌고는 입학식이 열리는 체육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 당신 참 잘도 버텼네? 이런 상황을?"
그러자 정우는 씩 웃으며
" 왜? 당신이 있는데 뭐 어때서? 당신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걸 아는데. "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없이 다정하게 내게 키스를 했다.
흐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정영과 정우를 바라보며 문득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별이라 생각하고 나온 것도 아닌 그때의 순간들.
내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의 마음이었을까. 내 마음이었을까. 내 탐욕이었을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었을까.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 없는 것만 같은 이 공간에 다시 와서 나는 무엇을 찾으려고 무엇을 얻고자 했나.
나는 서울에서 무엇을 찾고 얻었나. 치열한 삶과 하루하루 그리고 그 하루하루를 지탱하게 해 준 나의 기억.
소중했던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
어쩌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단지 나만의 착각이었다면 아니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라면 앞으로 그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 인사하게. 우리가 이번에 계약한 곳 위더스 사장이야. 요즘 잘 나가는 IT기업계의 큰손이지."
회사와 인수합병이야기가 오가던 회사의 사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대학원 준비로 1년간 제대로 업무에 집중을 안 해온 터라 스치듯 지나쳤던 이름. 서류상 보았던 싸인. 그 이름의 주인공.
민태호.
그를 다시 만난 건 사장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였다. 평소 내가 심리학분야 대학원에 진학을 목표로 공부 중인 것을 알고 있었던 사장은 입사 초기와 달리 나를 좋게 보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평가를 높게 하여 일반 사원으로 직위를 올려주고 거기서 대리까지 2년 안에 승진시켰다.
덕분에 나는 2년도 안돼서 회사에서 대리까지 승진을 한 케이스로 손에 꼽히는 인재가 되어 있었고 그런 특별 대우 덕분에 저녁에 있는 대학원 수업에도 차질 없이 주 2회를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배려를 충분히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참 일이 많고 바쁠 대리직급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오는 일은 매우 한정적이었고 나는 겨우 사장에게 가기 전 이사나 상무급에게 가는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바로 부장 승인을 거쳐 그 위에 결재라인으로 올라가는 일로 업무가 단순화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안 되는 일도 내가 가져가면 통과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하지만 그 연유가 이 자리를 빌어서 알게 되었지만 기업의 인수 합병과정에서 생긴 일이었고 그 중심에 내가 있었는지는 회사가 넘어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태호의 회사에 인수 합병이 되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태호가
" 금요일 저녁에 사장님과 대리님 모시고 근처 좋은 곳에서 식사를 대접할까 하는데요. 시간 괜찮으시면."
" 아 저희야 물론 가능하죠. 저희가 오히려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데 먼저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대리도 괜찮지?"
" 네? 아... 네. 저도 괜찮습니다. "
" 그럼 그렇게 하시죠. 그럼 장소는 비서 통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뵙죠. "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차를 타고 사라졌다.
" 식사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죠. 그럼 저와 권 상무님은 나머지 싸인을 마저 하고 정대리는 남아서 하던 브리핑 마저 끝내도록 하지. "
이미 인수합병도 끝나고 세부안을 조율하던 자리에서 느닷없이 사장은 위더스 측의 권 상무와 자리를 비웠다. 나머지 직원들도 다 같이 그들을 따라 나갔고 그 넓은 회식자리 겸 룸 자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온 후식들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 그렇게 휑하니 나와 태호만 남겨둔 채 비어버렸다.
" 굳이 이런 자리를 이렇게 만들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다음 주면 저 사람들 볼일 없을 테니까. "
" 그건 무슨 말이에요?"
" 새 잔은 새슬로 채우는 법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병을 들어 술을 채웠다. 그리고 내게 건넸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에 못 이겨 원샷을 했다. 그러자 그가 놀란 표정을 익살스레 짓더니 이내 다시 연거푸 한잔을 더 부어서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그가 준 다음 잔도 원샷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잔을 권하자 그는 정중히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그 옆에 있던 위스키를 한잔 부어 마셨다.
"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이셨군요. "
" 음 꽤나 오래 걸렸지. "
나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그를 노려 보며 말했다.
" 도대체 어디까지가 당신 계획인 거야?"
" 음... 당신을 만나려던 노력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당신을 곁에 두려던 노력을 말하는 건가?"
" 뭐가 되었든. 난 분명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러자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와 위스키잔을 들이켜더니 내 얼굴에 그의 얼굴을 바짝 대고 말하였다.
" 그래 뭐가 되었든 난 절대 포기 않는다고 말했잖아. "
그러며 그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은 뒤 내 목을 끌어당겨 그의 코가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들이키며,
"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벌써 항복하는 건 아니지?"
" 어디 할 테면 해봐. 나를 유혹해 보던지. "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그 큰 손으로 내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 몸을 타고 거칠게 손으로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내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 그의 품에 바짝 당겨 안았다.
" 후훗. 여전히 내 앞에만 서면 당신은 이렇게 파르르 떨고 있단 말이야. 아주 나를 미치도록 만들며."
그리고 이내 손을 풀어 위스키 한잔을 더 들이마시고는
" 이제 시작이니까 마음 급하게 먹을 필요 없어. 시간은 이제 많으니까. 볼일도 많고. "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집으로 향한 나는 미친 듯 옷을 꺼내 가방에 담다 다시 책을 꺼내 가방을 담다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이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내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나는 어리석게 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만 생각하고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현명하게 대처하고 노련하게 대해왔던 수많은 순간들을 뒤로 나는 왜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그 앞에만 서면 바들바들 떨며 분노하고 제대로 어떤 말조차 못 하고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마치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잔뜩 흥분을 한 채로 그렇게 태연하게 나를 대하는 그 앞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