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교정은 벚꽃으로 만개했고 좁은 언덕길을 열심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 내 등 뒤를 졸졸 누군가 따라왔다. 아까부터. 나는 휙 돌아보니 왠 새파란 남학생 둘이 서 있는게 아닌가.
" 할 말 있음 빨랑 해. "
" 저 누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 누나로 보이기는 하나 보지? 근데 어쩌냐? 난 너 같은 동생 만들고 싶은 마음 없는데."
이렇게 말하고 다시 휙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열심히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전날 강의 내용을 반복해서 들으며 걷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 중 누군가 내 이어폰을 잡아채며 말했다.
" 그럼 남친으로 받아주면 안되요? "
나는 낚아챈 이어폰을 다시 뺏고는 한참을 위아래 훑어 봤다.
'이제 고작해봐야 군대 제대했나 복학 갓했을 나이고 음. 그럼 어린 애들은 시시할 나이로 보이는 시기일거고 그렇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 보면 제법 놀아본 놈은 아닐거고. 고백한다고 용기는 냈겠네.'
" 용기는 가당한데 미안. 더 말 걸면 총여 간다. "
너무나 확고한 내 모습에 당황한 것일까. 아니면 내 태도가 그렇게 무서웠나. 그들은 그 자리 서서 한참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 싶더니 돌아서 되려 내려갔다. 그렇게 나는 잔뜩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고 때로는 있는 핑게 없는 핑게를 대며 철벽을 치고 근처에 사람이라고는 못 오도록 만들었다. 고작 몇 안되는 대학원생 중에 그나마 말터 놓고 편하게 인사하는 동기는 남학생 한 두명 아니면 조교샘이었다.
"어이 미소 어디가?"
" 도서관"
" 열심히 해."
우리가 나누는 대화. 이게 내가 아는 사람들과의 친분 거리.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 문득 장서 너머 눈길이 가는 사람이 보였다.
하아 나는 한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연우가 떠올랐다. 연우와 밤을 보낸 뒤 왠지 모를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느새 내 안에 남자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운명처럼. 만약에 나와 정말 잘 맞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만난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한 밤은 어떤 느낌일까.
돌이켜 보면 남자가 다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다.
연우는 내게 항상 든든한 오라버니였고 나를 보호해주는 보호자였다. 어떠한 사심이 느껴지지 않도록 그는 항상 절제를 잘 해왔고 양평에 다녀 온 뒤로는 우리사이에 어떠한 대화 주제도 거리낌 없이 자연스레 소재가 되어 이야기의 흐름은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어떤 설레임이나 두근 거림인데 연우와 함께 하는 동안 나는 그가 무서울 경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에게서 이성적인 두근 거림, 뭐랄까 어떤 기대감이나 그런 콩닥거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편하게 대했고 또 연우도 나를 편하게 보고 있는지 모른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눈앞에 보이던 인상적인 남학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흠칫 놀라 두리 번 거리는데 누군가 내 곁에서 팔을 들어올리는게 아닌가 바로 곁에서. 나는 순간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두두둑 떨어뜨렸다. 그리고 바닥에서 주워 고개를 드는데 책을 내리는 그와 눈을 마주쳤고...그는... 응? 바로 그였다.
맞은편에서 내 눈길을 사로 잡은 사람.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어보이더니
" 미안. 피할 줄 알고. "
그렇게 말하며 내 곁을 훅 하고 지나가는게 아닌가. 콩닥 통닥. 이건 뭐지?
한동안 도서관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비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그렇게 두리번 거렸다.
주변에 물어볼까 하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 철저히 나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으니 주변 소식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란 고작 도서관 죽순이. 알바가 없는 날이면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그를 기다렸고 새벽같이 나가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보다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러다 보니 읽은 책만 엄청 났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가 남자를 찾고 있었던 건지 내가 책 속에 파묻혀 지냈는지 감이 안왔다. 그렇게 두어달 지나고 또다시 여름 방학이 다가왔다. 이제는 더이상 알바도 미룰 수 없고 모아둔 돈도 없기에 결단이 필요했다.
운명 따위 개나 줘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 주제에 무슨.
그렇게 도서관에 앉아 책을 보다 결국에는 책을 두고 그대로 일어나 터덜대는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다른 때보다는 조금 일찍. 오늘은 정말 알바자리를 구해야한다. 부지런히.
집에 도착해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며, 그렇게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놈의 알바 인생. 근처 한바퀴 돌면 되는 일인데 왠일인지 오늘 따라 무지 나가기 싫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 대리 기사님 여기가 어디냐면요."
느닷없이 걸려온 연우의 전화에 달려간 곳은 회식자리였다. 그는 과 회식자리인지 왁짜지껄한 삼겹살집 앞에 그렇게 서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응? 술도 많이 안먹은거 같은데... 왜 벌써 일어났어요?"
" 아. 그냥 오늘은 좀 쉬고 싶네. "
" 연우선생. 어디가? 벌써 가려구?"
그런 연우를 누군가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조금 떨어져 모른 척 외면하며 서 있었는데,
" 저 죄송합니다. 오늘은 몸이 좀 안좋아서요. 대리기사도 기다리고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자. 그러지 말고 일단 그쪽은 이거 받고 가시고 연우선생은 그냥 좀 더 있다가. 이대로 가면 안돼지. "
그렇게 말하며 연우를 붙잡은 사람은 내게 돈을 주며 돌아가라고 말했다. 일단 차에는 막상 올라탔는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상황을 지켜봤다.
연우의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한데 도통 알 수 없는 저 표정. 하지만 확실한 건 평소 나를 대하던 그 표정과는 정말 다른 표정이라는 거. 뭘까. 저 낯설고 뭔가 슬픈 거 같기도 하고 화가 난거 같기도 하고 난처한 거 같기도 하고... 차를 몰아 한바퀴를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서 연우를 기다렸다.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그들이 그 삼겹살 집을 나와 어디론가 사라진 뒤 다시 한참이 지난 시각.
모퉁이를 돌아 나와 몇 몇 일행은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고 몇 몇은 서서는 담배를 피고 이야기를 하고 그런 그들 옆에 서 있던 연우는 다시 내게 전화를 했다.
" 대리기사님이죠? 여기 봉천동 00삼겹살 앞입니다. 여기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이미 난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게 기다린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지? 저 사람들은 갈 생각이 안보이는데...후아.
" 오빠 나 앞에 있는데 어떻게? 그냥 일단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그렇게 또 한참을 한참을 기다렸다. 모두 가는 걸 기어이 보고 나서야, 나는 차에서 내렸다. 삼겹살 집 앞에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연신 담배를 물고 있던 그의 손에서 담배를 뺏어 버리고 나는 그를 부축해 뒷자석에 태웠다. 그러자 그가 냉큼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 대리기사님. 강남역요."
" 네. 댁으로 모셔다 드리죠. "
그렇게 아무 말없이 차를 몰아 연우 집앞으로 갔고 그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자 벌떡 일어나 앉더니 대뜸 지갑에서 내게 10만원을 꺼내 주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말했다.
" 됐어요. 안받을래요. 그냥 학원비라 생각하고 차근 차근 차감해줘요. "
" 받아. 그건 투자금이니까. 이건 네 알바비고. "
나는 연우가 내민 돈에서 9만원을 다시 거슬러 그의 지갑에 넣었다. 그러자 연우가,
" 차비도 안나오겠다. 어떻게 가려고? 이 늦은 시각에. 차도 없는데."
" 그르게. 누가 오늘은 정말 여러므로 골탕을 먹이네요. "
" 그러니 좀 받지. "
" 그럼 말해봐요. 무슨 일인지. "
" 왜 내가 말하고 돈까지 줘야해?"
" 음... 그건 상담비?"
" 뭐?"
" 왜 있잖아요. 남한테 말 못할 이야기 들어주고 상담하고 뭐 그런거. 그런 상담비라 생각해요."
" 음. 그래 좋다. 그럼 일단 받아. 근데 너 집에는 어떻게 갈거야?"
" 일단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
" 그럼 일단 그 돈 받으면 말할게. "
" 알았어요. 접수."
나는 아주 태연하게 상담비라는 명목으로 다시 9만원을 그의 지갑에서 꺼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 꼬맹이 돈 뜯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야."
" 뭐래. 이제 말해 봐요. 무슨일인데 도대체. 뭐가 그리 심각해요?"
" 흠."
그는 긴 한 숨을 쉬더니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한잔 들이키고는 식탁에 앉아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담배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한 숨.
"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회식자리에서는 가끔 내방 한 환자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날 따라 유독 사람들이 호들갑스럽게 호사가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법한 잘나가는 집안 이야기를 했고 그런 와중에 그는 아는 이름이 나와 술잔을 들이키다 순간 멈칫했다고 했다. 차트를 확인한 의사말이라고 하니 맞겠지.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연우 앞에서 한 건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농담반 진담반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며 부부가 심하게 다퉈서 아내가 응급실에 실려왔는데 VIP병동으로 옮기고 다시 오후에 퇴원을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며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일은 모르니 어쩌니 하는데 막상 아는 사람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더 듣기 불편해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오려고 하자, 선배가 와서는 연우를 데려가 선배와 술을 한잔 더 하고 왔다고 말했다.
" 오빠. 오피스텔로 데려다 줘?"
" 뭐하러?"
그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 그 사람 미란언니 아냐? 아마 집 나오면 호텔에 있을거 아냐? 아님 전화라도 해봐?"
" 아니."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다시 피기 시작했다.
" 오빠가 신경쓰여서 그런거 잖아..."
" 내가? 왜? 내가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닌데?"
" 그럼 표정이 왜 그래.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
" 그럼 기분 좋은 표정일 수는 없잖아. 아는 사람이 서로 치고 받고 맞았다는데. 하암~~"
그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마치 귀찮다는 듯이.
" 오 미란언니 대단하다. 때리긴 했나보네. "
" 야. 너. "
" 신경쓰이면 전화해봐. "
나는 그에게 내 전화에 적힌 미란언니 연락처를 보여주며 말했지만 그는 바라보지도 않고 그냥 담배만 펴댔다. 그러다 다시 침대로 가서는 다리를 걸치고 누었다. 그러더니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뉘엇뉘엇 말하기 시작했다.
" 문제는... 그게 아니란 거지. 내가 온통 다른데..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게 더 당황스러. ....이런 적 없었거든. "
" 응?"
" 답이 없는데... 불명확하고 분명하지 않은 곳에... 내가 답을 찾고 있다는 점이야. 그게 나를 당황시켰어."
"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의 숨소리는 점점 느려졌다.
" 으음. 그게... 아주 사소한 건데 ....난 나름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었거든?.... 나름은.....흐음... 행복해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너무 좋았어....."
그리고 그는 다시 휙하니 돌아 누었다. 그리고 침대를 한번 손으로 스윽 쓸었다. 그리고는 점점 더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 성취감도 있고.... 보람도 있고... 내가 알던 세계와 전혀 다른데.....흐음.... 변수가....... 생긴 거야. ....."
나는 연우의 말을 듣다 연우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그를 바라봤다.
" 응? 도대체 그 변수가 ...뭐....응? 헐...."
그는 그렇게 말하다 그대로 누어서는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