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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델루나 Jan 15. 2016

공주필지-3

(공동체주택을위해필요한지식)

우리의 도시는 어쩌다 외로워 졌을까?

내가 유학했던 뉴욕에서는 대학생이나 젊은 직장인이 타인과 함께 사는 '룸쉐어'나 '쉐어하우징'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꺼려한다. 아니 두려워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기엔 이 도시는 너무나 냉혹하고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일부 기숙사를 이용하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셰어 하우징'을 부모님과 보내게 된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맺어진 인연의 대부분은 가족과 친족 그리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이다. 이때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형성된 유대감으로 인해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 일이 거의 없다(사춘기적 방황과 고독은 여기서 제외하자) 그리고 대학에 진입하면서는 대부분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대도시의 대학에 진학한다. 초기에는 낯선 타향살이에 외로움을 느끼지만, 대부분 곧 친구가 생기고 같이 수업 듣고 동아리 활동하면서 그 외로움이 사라진다. 아니 오히려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 근처 술집에서 밤새 수다를 떨다 보면 그토록 자신이 염원했던 대학생활이 이거구나 하면서 오히려 독립을 즐거워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를 완전한 '독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혼자 살지만 부모님에게서 생활비를 받고 식사의 대부분은 편의점에서 해결하며 항상 전화 등으로 부모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이라기보단 일종의 '자취'에 가까운 것이며, 그저 부모님 집에서 자신의 방을 떼어내 대학교 근처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즉 아직도 가족과의 유대 속에 있는 것이며, 새로운 유대가 조금 부족해진 곳을 메꾸어진 것뿐이다.

그리고 직장인이 되면 대학 근처를 떠나 회사와 가까운 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혹은 아예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러면 그동안 사귀었던 친구들과도 헤어지게 되고 다들 자신의 생활에 치여 점차 연락이 뜸해진다. 물론 직장에서도 새로운 동료를 사귈 수 있게 되며 아는 사람은 늘어가겠지만, 직장에서의 친분을 쌓아가는 것과 학창시절에 친구를 사귀는 것과는 같다고 볼 수  없다. 실제로 일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장동료를 주말이나 휴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을 수업시간에 매일 보더라도 주말에 또 보는 것은 자연스러웠는데 말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일단은 일이라는 '공적'인 업무를 위해 자신의 성향이나 취향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끼리 모여있기도 할 뿐 아니라 고용주와 피고용자 상급자와 하급자 같은 금이라도 먼저 입사한 사람과 나중에 입사한 사람 간의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등하지 않는 관계'에서 어떤 친밀감과 유대가 제대로 생길 수 있겠는가? 또한 성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이전에 회사를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기업문화는 붕괴된다. 예전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회사는 항상 의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료가 있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경쟁상대인 소리 없는 전쟁터나 다름이 없다. 성과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팀이 아니라 개인이 잘해야 살아남는다. 실적이 좋은 사람은 직급과 임금이 높아지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이렇게 하루의 전쟁을 마치고 지친 몸을 끌고 귀가하며 나를 기다리는 것은 컴컴한 원룸이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새도 없이 잠이 들어 버린다. 직장인으로서 혼자 산다는 것은 그런 쓸쓸함과 지침의 연속이다. 대학생 시절에 혼자 살 때는 수시로 친구 집에서 혹은 내 집에서 서로 옮겨 다니며 술과 함께 밤을 새웠기에 가끔 타향살이의 외로움이나 혼자라는 느낌을 날려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럴 때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술 한잔하는 것도 내일 일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모두들 도시에 살면서 평생 원룸에서 지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가족들과 떨어져서 잠시 살다가 자신만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 때까지 잠시 지내는 '임시 거처'쯤으로 여길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곳을 '임시 거처'로 생각하니 이곳에 '애정'을 붙일 리도 만무하며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의 '유대'또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피해가 안 갔으면 좋겠다는 이기주의만이 그곳을 지배할 뿐이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는가? 아니 알더라도 겨우 이름이나 얼굴 정도가 다이지 않을까? 이렇듯 서로의 무관심은 임시 거처인 원룸이 범죄의 대상이 되게 하며, 그곳의 주민들은 주민자치에 지장이 있다며 원룸에 사는 사람들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나 자신조차도 원룸에 살 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고 옆집에서 밤낮으로 울어대는 고양이 소리 때문에 자증만 냈었다. 

직장에서도, 그리고 이웃에게서도 유대감을 찾을 수 없는 우리의 외로움을 어디서 해결할 수 있을까? 또한 이제는 어린 시절과 달리 어른이 돼서 다시 부모님과 사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정말 새로운 가정을 찾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것일까? 나는 '공동체 주거'가 그 해답의 실마리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전깃불이 켜진 방이 보이고 현관문을 열면 거실에 앉은 동거인들이 티브이를 보면서 맥주 한 잔을 하고 있다. 들어오는 나를 보며 "같이 한잔할래?"라면 한마디 건네준다면 일에 지쳤던 내 하루에 조그마한 위로 정도는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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