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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09. 2019

때늦은, 바리데기 독후감


<비게덩어리>의 작가 모파상은 습작 시절 선배에게 들은 다음 이야기를 평생 소설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다 한다.
 
“파리 시내에는 마부(馬夫)들이 엄청 많다. 겉으로 보면 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거리에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이 천양지차 다른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표현 대상이 되는 인간에 대해 끈질기고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철저할만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연주의 문학의 완성자라 불리는 모파상다운 발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문학조류들은 확실히 당대의 반영이다. 작가들이 그러한 시대를 살았기에 그런 문학이 나왔다는 말이다. 러시아혁명이 없었다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합리주의 모더니즘 신화를 박살낸 바르샤바연합군의 프라하침공이 없었다면, 어찌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쓸 수 있었겠는가.
 
모파상 류의 자연주의 문학은 산업혁명이 증기기차의 질주처럼 맹렬한 속도를 내고 있을 시기의 물적토대와 상부구조의 만화경을 뚜렷히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객지>에서 <장길산>에 이르는 황석영의 걸작들도 강산을 들쑤신 박정희 개발독재기의 원시적 자본축적 상황이 없었더라면 결코 태어나기 어려웠을 작품들이다.
 
황석영이 (방북과 망명과 투옥의)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오래된 정원>의 성공과 실패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샛노란 개나리 닮은, 수줍은 로맨티시즘과 눈부신 문장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후반부에서 갑자기 스토리적 긴장과 방향성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왜 회고적 조망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을까?
 
5년 동안의 긴 감옥생활 속에서(이 시기는 IMF 시기와 겹친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던 20세기 후반 남한사회의 신자유주의적 흐름을 작가가 몸으로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석영은 황석영이다. 소설 <바리데기>에서 우리는 (시대에 복무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만난다.
 
황석영 문학에 있어 <바리데기>는 두가지 측면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보여준다 생각된다.
 
첫째는 표현기법 혹은 문체(style)적 변화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굳게 발디뎠던 정통 리얼리즘을 훌쩍 벗어난다. (그가 시도해보리라 공언했던)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초현실주의적 묘사를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내가 보기에) <바리데기>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은, 주인공 바리가 영국으로 오는 화물선 뱃바닥에서 겪은 참극을 풀어내는 장면에 있다. 그 참혹한 모습을 플로베르 스타일의 혹은 <객지>에서와 같은 냉혹한 리얼리즘으로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우리는 더 이상 참기 힘들만큼 비린내 나는 지옥도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그같은 정면대결을 슬쩍 피한다. 불현듯 훔쳐본 무간지옥을 묘사하는, 배려심많은 영매(靈媒)처럼 능청스럽게 심지어 거기에 심미적 아우라의 휘장까지 둘러쳐서 '절망의 밑바닥'을 '구원의 예비처'같이 펼쳐낸다.  
 
둘째는 소설의 구조와 주제의식이다. 작가는 여러 지면을 통해 기존 리얼리즘의 틀로는 더 이상 정신없이 질주하는 이러한 인터넷시대의 총체를 담을 수 없다는 절망을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런 절망을 넘어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고민을 밝힌 바 있다.
 
<바리데기> 말미에 붙은 작가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히듯 이 작품에서 황석영은 우리 전통 원형신화로서 황천무가(黃泉巫歌) 또는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을 평안하게 저승으로 보내주는) 진오귀굿의 이야기 구조를 빌려와 이것을 전혀 다른 형상으로 풀어낸다.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있지만, 아무도 주목하거나 도전하지 못했던 서사의 황금동굴을 찾은 셈이다.   
 
<바리데기>는 형식미학에서 '옛날 황석영’을 확실히 넘어선 어떤 언덕에 올라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소설의 미덕은 따로 있다. 문장과 이야기틀의 외형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작품 주제가 여전히 "여기 현실의 땅 위에" 굳게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다. 남한사회의 가혹한 계급 모순에 집중되었던 작가의 문제의식이, 폭과 깊이에서 더욱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작 <오래된 정원>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하였던 100여년 민족 과업이었던 이데올로기 간 화해는 물론이다.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사적 차원으로 소설의 커버리지가 넓어지고 (바리의 남편은 파키스탄 핏줄의 무슬림이며 아프간 전쟁과 관련하여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는다) 세상과 삶에 대한 연민이 한 길 더 깊어지는 것이다.     
 
<바리데기>는 90년대 북한을 휩쓴 기아(飢餓) 문제와 가족 이산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조명하는 상황문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후 감상은 매우 색다른 무엇이다. 분노와 비탄의 찌르는 듯한 각성 대신, 깊은 긍정과 안도(安堵)의 파토스(pathos)가 남는 것이다.
 
땅 위에 현실로 구체화되는 이념의 덧없음, 처절한 굶주림과 생이별. 그리고 마침내 딸의 죽음이란 절대 심연을 넘어 바리가 다다른 곳은따스한 빛살이 스며들어오는 낙관의 공간이다.
 
나는 황석영이, 지금까지 분단소재 문학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에서 가장 진지했고 이문열의 <영웅시대>에서 가장 자기분열적이었던) 금기를 과감히 뛰어넘어 보다 '다이렉트하게' 한반도 북쪽 세상과 사람에 대하여 조명을 때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함경도 어느 작은 국경도시에서 출발하여, 중국과 런던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가는 길고긴 여정의 목적지가 바로 그곳이라고 본다.
 
진창에서 헤매다 다시 희망없는 진창으로 돌아오는 냉혹한 현실인식과는 다른 무엇, 이것을 작가 황석영이 표현과 주제 모두에서 펼쳐보이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화해와 희망"이라 이름붙일 수는 없을까.
 
소설 <바리데기>는 "삼포 가는 길"에서 시작해서, 북한 방문과 실질적 해외망명 등의 갖은 풍파를 겪은 다음, 마침내 작가가 다다른 내적 전망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가 앞으로 펼쳐갈 진경이 어드메 자리잡을 것인지를 예고한다.
 
나는 후속작 <손님>을 읽고 그같은 방향성을 보다 뚜렷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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