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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1. 2019

시애틀에서 만난 아코디언 청년

여행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특히 그렇다. 그 곳에서 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귓가를 스치는 타국어와 공중을 뛰어다니는 바람 속에서 얼마나 작고 외로운 존재인지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으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산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순간, 나는 나를 내려놓게 된다. 내 삶은 얼마나 좁고 제한적인가, 내 생각은 얼마나 턱없는 편견에 불과한 건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통해 기억에 남는 것은 풍경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다. 풍경은 그저 사진으로 남지만 사람은 가슴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에서 런 사람을 만났다.

파이크 플레이스는 시애틀을 대표하는 재래식 공영시장(public market). 별명은 “시애틀의 영혼”. 1907년에 처음 문을 열었으니 역사가 백년이 넘었다. 북태평양에서 갓 잡은 싱싱한 생선과 갑각류들이 시장 안에 가득하다. 농장에서 직송된 야채와 과일이 반짝반짝 미소짓는다.



꽃가게가 줄지어 있고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상인들이 그득하다. 배달 상자 나르는 종업원의 장난기어린 웃음이 천장에 부딪힌다.



이곳의 명물은 4, 5미터 이상 거리를 서로 생선을 던지고 받는 가게 청년과 아가씨들. 멍하니 그 모습 구경하다 자칫 비린내가 옷에 튀길 수 있으니 조심할 것. 물론 맛있고 가격 저렴한 식당들도 시장 안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꾸미지 않은 생생한 에너지가 공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을 들어서는 순간 느낄 수 있다. 월마트, 타겟 등 거대 자본이 유통을 장악한 미국에서 이런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는 매우 드물다. 매장이 깨끗할지는 몰라도 규격화, 표준화된 그런 공간은 그냥 싼 가격에 물건 구입하는 곳일 뿐이다. 사람 냄새가 사라진지 오래인 게다. 그러니 이처럼 펄펄 뛰는 인간의 에너지, 흥청대는 웃음과 목소리 가득한 파이크 플레이스에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려 천만 명이 한 해 동안 이곳을 찾는다. 시장 메인(main) 출입구 쪽에 그 유명한 스타벅스 커피 1호점이 위치한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원래 첫 매장근처에 있었는데 위치를 옮겨 재개장한 곳이 지금 1호점이라고). 현재 통용되는 스타벅스의 심볼마크는 아래와 같이 생겼다. 유혹적인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서 배를 난파시키거나 스스로 물에 뛰어들게 한다는 지중해의 인어 세이렌(seiren)을 이미지화시킨 거다. 그림을 보면 인어가 양 팔을 몸통 옆에 치켜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태인 출신으로 알려진 고든 보커, 제럴드 제리 볼드윈, 지브 시글이 1971년에 개장한 1호점에 사용한 로고는 현재와 달랐다.  뱃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세이렌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벌거벗은 상반신을 고스란히 노출시킨 그림이었다. 이 노골적 비주얼은 여성단체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고, 할수 없이 디자인을 변경한 것이 지금의 심볼마크가 된 것이다.


시장 앞 스타벅스 1호점에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 48년전의 옛 심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만 그렇다 한다. 이곳에서만은 자기들 전통을 보존하겠다는 (유태인들 특유의) 고집으로 이해한다. 매장 밖 벤치에는 동네 할배처럼 보이는 분들이 느긋하게 앉아서 종이잔에 커피를 마시고 있다. 하나같이 야구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상당히 긴 줄을 기다려 마신 원조 아메리카노 맛은? 실망스럽게도 한국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



그렇게 커피집 문을 밀고 나오는데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근처에서  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게다. 그게 뭐가 묘하냐고? 특하게 굽이치는 이 슬픈 멜로디 일전에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석달 전 뉴욕에서.

여름 열흘 이상을 뉴욕에 머물렀다. 숙소를 뉴저지 쪽 한국인 민박에 잡았는데 경악할만한 시설과 대접이었다. 사흘을 겨우 견디고 옮긴 곳이 뉴욕대학 근처의 작은 원룸. 잠시 귀국한 우리나라 유학생의 아파트를 일주일 간 빌렸다.

악명높은 교통혼잡 때문에 뉴욕에선 차 몰고 다니기가 어렵다. 그래서 에어컨이 고장난 싼타페를 정비소에 맡기고 주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녔다.

가장 많이 사용한 역은 워싱턴 스퀘어 근처의 웨스트 4번가 역. 이 역은 구조가 독특했다. 입구 계단을 내려서면 개찰구까지 100미터 정도 비스듬히 통로가 기울어져 내려가는 구조다. 이곳이 바로 거리음악가들의 천국이었다.

기타치며 나지막히 가사를 읖조리는 컨트리송 가수에서부터 흑인 래퍼와 타악기 연주자까지. 그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이 아코디언을 켜는 청년이었다.


속눈썹이 기다란 옅은 초록빛 눈. 소박하고 조용한 미소. 살짝 창백한 안색에 콧날이 곧게 뻗은 청년이었다. 갈색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스스로 선율에 취해 건반 위를 춤추는 손가락. 길거리에서 듣기 힘든 수준급 연주였다. 아코디온이란 악기가 원래  정감이 깊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음악은 더욱 따스하고 아름다웠다. 애잔한 정서가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다. 역을 오갈 때마다 한참을 멈춰서서 연주를 들었다. 팁을 주고 잠깐씩 인사를 나누었다.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었다.

뉴욕은 대서양 연안, 시애틀은 태평양 연안. 아메리카 대륙의 정반대 쪽에 위치한 두 도시 사이 거리는 4,500킬로미터 이상이다. 한숨도 안 자고 차를 몬다 치자(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속 100킬로미터 정속주행으로 하루 24시간 꼬박하고 다시 스물 한 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 그만큼 서로 멀리 떨어진 도시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애틀의 10월말. 어스름 노을 지는 거리에서 뉴욕에서 만났던 아코디언 선율이 들려온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소리를 찾아 가본다. 건너길모퉁이. 역시 그 청년이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는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어떻게 시애틀에 왔냐고 물는다. 며칠 전에 건너 왔단다. 뉴욕의 겨울 추위는 길거리 음악가들에게 가혹하다. 하지만 북태평양 아열대 환류 영향을 받는 시애틀은 날씨가 온화하다. 무엇보다 뉴욕 못지 않게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사진을 찍고 팁을 (이번에는 듬뿍) 주고 포옹을 한다. 그리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나는 청년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것은 있다. 예술 영혼의 눈물이요 웃음이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하는 이의 마음이 추할 리 없다. 그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선량하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멀어지는 발걸음 뒤에서 다시 아코디언 연주가 시작된다. 가슴을 뒤흔드는 애잔한 선율. 그 소리를 들으며 새삼 인연의 아득함을 생각한다.

우주를 떠도는 먼지와 같은 우리. 하지만 당신과 나는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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