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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5. 2019

아메리카 부산 갈매기

1.

시애틀에는 커피숍이 정말 많다. 파이크플레이스 마켓 일대의 가게에서 버리는 엄청난 커피 찌꺼기 때문에 연안의 물고기들이 카페인 중독에 빠졌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다. (농담이 아닌 진짜다). 


스타벅스 정도는 코웃음치는, 자부심 높은 카페들이 수두룩하다. 경쟁이 치열해서일 게다. 맛이 모두 훌륭하다. 실제로 2019년 월렛 허브에서 커피 가격, 커피숍의 분포, 커피의 질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미국 베스트 커피 도시>로 뽑힌 바 있다.


툴리스 커피(Tully's coffee), 시애틀 베스트 커피(Seattle's Best Coffee) 같은 유명 브랜드들이 모두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요즘은 새롭게 조성된 계획도시 벨뷰(Bellevue) 지역에서 도트(Dote), 우즈 커피(Woods Coffee) 같은 신흥 디저트 카페 브랜드가 떠오르고 있다.



그밖에도 자이트가이스트 커피(Zeitgeist Coffee), 폰테 카페(Fonté Café) 등 도시 전체에 무려 1만 개가 넘는 커피숍들이 저마다의 맛을 뽐낸다. 커피 애호가들이 시애틀을 이탈리아 로마와 함께 커피의 성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다운타운은 크지 않다. 웬만한 체력이면 대표적인 명소를 충분히 걸어서 구경 다닐 수 있다. 렇게 길을 걷다 커피향에 끌리게 되면 아무 카페나 불쑥 들어가시라. 집집마다 모두 특하게 차별적인 맛을 경험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밤새 뒤척인 것은, 아마도 이 맛있는 커피들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 싶다. ^^


시애틀을 찾을 이유는 그밖에도 많다. 만약 당신의 시간이 넉넉하고, 쿵푸스타 이소룡 팬이라면 레이크뷰 묘지에 그의 무덤이 있으니 참배를 하면 된다.  


이소룡과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묘비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도시 곳곳에 그의 기념물과 사진들이 있다. 구석구석 그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재미를 누려도 좋다.


옷가게에 걸려있는 지미 핸드릭스의 모습


하지만 이박 삼일 이상 시애틀에 머무를 여유가 없다면 반드시 가야할 곳으로 두 군데를 추천한다. 하나는 지난 번 소개한 파이크플레이스 마켓이다. 도심에 있다. 다른 한 군데는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시애틀센터(seattle center) 지역이다.


미국 서북단의 자그마했던 이 도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1962년 엑스포 개최였다. 이 행사를 위해 조성된 곳이 바로 시애틀센터다. 75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땅에 예술, 교육, 관광, 오락 시설이 집결되어 있다.  


파이크플레이스 마켓에서 시애틀센터는 1.7킬로미터 거리. 시장 근처와 다운타운 지역을 빈둥빈둥 구경하다가 모노레일을 타시라. 눈깜짝 할 사이에 시애틀센터 알웩(Alweg) 역에 도착한다. 총연장 2.5킬로미터에 탑승시간 5분 정도(가격은 왕복 4.5달러, 밤 11시까지 운행)니 마음만 먹으면 하루 몇 번이라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센터 지역에서 대표적 아이콘은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 그  옆에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폴 알렌이 세운 EMP 박물관이 있다. 록큰롤과 팝 컬쳐(pop culture) 수집품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스페이스 니들
EMP 박물관 입구


미국 여행 다니면서 고층건물 전망대와 박물관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두 곳은 생략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절대 빠트려서 안될 곳이 있다. 세계적인 유리공예가 데일 치훌리 (Dale Chihuly)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치훌리가든앤글래스(Chihully Garden and Glass, 약칭 치훌리 가든) 그곳이다.


데일 치훌리의 작업 장면


시애틀 비가 많은 걸로 유명하다. 특히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집중적으로 내린다. 도착하던 날부터 그랬다. 그리고 이틀 동안 돌풍, 소나기, 구질구질한 비까지 삼종세트를 선물받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돌변했다. 뉴욕이 왠지 화장빨 짙은 쇼걸 느낌이라면, 이 도시는 변덕 심한 귀여운 20대 아가씨 같은 느낌이다. 가을 햇빛을 받으며 낙엽이 익어간다. 다운타운에도 (도심에 있는 큰 호수) 워싱턴 레이크 주변에도 가을이 붉게 깊어간다.    


내가 치훌리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 로비 천장에 매달린 ‘피오리 디 꼬모“란 이름의 조형물이었다. 목이 아플 때까지 넋을 잃고 쳐다본 생각이 난다. 하나 하나 입으로 불어 만든 유리꽃이 무려 이 천 송이나  천장에 피어 있으니 그럴 수 밖에. 1998년에 설치된 이 작품은 밑에서 올려다보기만 해도 살이 쑥쑥 빠진다는 재미난 전설이 있다. 그래서 라스베가스 온 김에 살도 빼보겠다는 진지한 소망으로 그 아래 진치고 있는 아줌마들이 실제로 적지 않다.


피오리 디 꼬모


치훌리가든에는 ‘피오리나 디 꼬모’ 못지 않은 작품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18달러 입장료가 전혀 안 아깝다. 투명 혹은 반투명의 온갖 색깔 유리를 떡처럼 주물러 꿈같은 장면을 창조해내었다. 밤 8시까지 문을 여는데, 주간에도 오고 야간에도 올 수 있는 티켓(1회 방문용보다 비쌈)도 판다. 밤에 보면 더욱 환상적이라는 뜻이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더 기억이 선명한 것은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자 벽에 붙어있는 대형사진들. 이 지역에 살았던 옛 인디언 원주민들을 찍은 것이다. 브라운컬러 모노톤으로 찍힌 그들의 모습. 슬픔과 안타까움과 삶의 무상함이 뒤섞인 묘한 감동을 주었다.



도시의 이름 자체가 옛날 이 지역을 지배하던 부족 족장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수쿠와미디 부족의 수장 시애틀(Chief Seattle, 1786-1866)이 그다. 맹렬한 기세로 서부로 서부로 밀려들던 백인들과 공존을 모색하다 결국 땅을 빼앗기고 멸망한 북서부 아메리칸 인디언들. 그 가혹한 운명을 상징하는 이 사람의 흉상이 시애틀 시내에 있다.


치훌리가든에서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받은 것은 바다생활 방(Sealife room)에 전시된 바다생활 탑(Sealife Tower). 총 4.5미터 높이의 단일 조형물이다.



해초를 상징하는 꼬부라진 유리관에 붉고 푸르고 노란 가지각색 바다꽃이 황홀하게 피었다. 이것이 대체 어느 바닷속 풍경이련가. 조명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유리 조형들이 꿈틀대듯 어두운 공간 속을 헤엄쳐다닌다.

 

그밖에도 경탄을 자아낼만큼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들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다생활 탑(Sealife Tower)



2.

도시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애틀아트뮤지엄(Seattle Art Museum)을 찾기로 했다. 회화, 조각, 설치예술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뛰어넘는 일급 작품을 전시하는 곳. 특히 입구에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가 만든 초의 <망치질하는 남자, Hammerign Man>가 서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도 이 작가의 비슷한 작품이 있음). 1분 17초마다 한 번씩 거대한 강철 팔을 움직여 망치질을 하는 남자 말이다.


망치질 하는 남자


그런데 일이 안 풀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이 휴관이란다. 또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부슬비. 이대로 떠나야 하나 아쉬움에 차 안에서 망설인다.


그 순간이었다. 노상 주차장에 세워둔 (렌터카로 빌린) 토요타 세콰이어 옆에 뭔가가  나타났다. 비에 젖어드는 초록색 모자 하나. 그런데 거기에 <부산 갈매기>라는 ‘촌스런’ 폰트의 한글 다섯 글자가 떡하니 박혀있는 게 아닌가?


가늘고 동그란 은색 테의 안경을 끼고 흰 수염이 얼굴을 덮은 백인 할아버지다. 리호리한 몸매에 짝 낡은 네이비 점퍼,  코듀로이 바지에 배낭을 맸다. 지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이다.


이국 땅 낯선 도시에서 부산 갈매기를 만나다니, 왈칵 반가움이 생길 수 밖에. 창문을 내리고 물어봤다. 모자에 적힌 글자가 무슨 뜻인줄 아냐고. 그랬더니 이런 답을 한다.  


물론 알지. 사안 시걸(Pusan Seagull) 이잖아.”


나보고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맞다고, 텍사스에 사는데 시애틀로 여행 왔다니까 깜짝 놀란다.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며느리가 한국 사람이란다. 한글이 박힌 이 낡은 자도 며느리가 준 거란다. 며느리가 좋으니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다. 모자가 너무 멋져서 늘 쓰고 다닌단다. 그래서 후줄그레졌다는 게다(촌스런 이깟 야구 모자가 가 그리 멋질까, 그저 며느리가 뻐서겠지^^).


빗방울이 창문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래도 상관없다. 계속 대화를 나눈다. 아들이 대학생 때 미국 유학 온 며느리를 만났단다. 그렇게 서로 아끼는 커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는 게다. 지금은 둘이 같이 파리에 공부하러 갔단다. 아들 부부 자랑이 끝이 없다. 며느리가  재주가 많아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한글을 가르친단다.


내가 묻는다.


“그거 부산을 상징하는 야구 모자인 거 아세요?”


“알고말고!”


며느리 고향이 부산이라는 거다. 거기가 내 집이라니까 무척  반가워한다. 한국에는 아직 못 가봤는데 가게 되면 항구도시 갈 거란거다. 그밖에도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남대문도 알고 “사이의 강남스타일”도 좋아한다.


칠순이 훨씬 넘어보이는 얼굴에 가느다란 . 눈썹이 하얗고 눈꼬리가 살짝 쳐져있다. 고의 백미(白眉)는 웃을 때 모습이었다. 곡선을 그으며 아래로 기울어지는 눈마치 소년처럼 드럽고 정스런 것이다.  


그가 내게 보이는 관심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걸 금방 알겠다. 아들아이가 그토록 사랑하는 며느리. 그 며느리의 나라에서 온 관광객이 순수하게 반가운 거다. 구김없는 마음이다. 이 사람은 타고  천성 자체가 다정한 사람인 것이다.


야구모자가 비에 젖어 완연한 진녹색으로 변했다. 이제 일정이 있어 떠나야 되겠다고 말했다. 렌터카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간다니까 먼 여정에 길 조심, 차 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한다.


“선생님께도 하느님의 축복을”


나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별인사를 한다.


그렇게 네비게이션을 점검하고 시동을 거는데, 누가 똑똑 창문을 두들긴다. 다시 할아버지다. 손주를 데리고 왔다. 쭈볏쭈볏 부끄러워하는 일고여덟 살 정도 금발 사내아이. 할아버지는 내가 묻기도 전에, 이 아이는 “That grandson”이 아니란다. 파리 가 있는 아들부부는 아직 아이가 없다는 거다. 그러니 꼬마에게 의 나라에서 온 사람을 인사시켜주려 한 것이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작별을 안 할 수가 없다. 차에서 내려 할아버지와 등두들겨 포옹을 하고 아이껴안아준다. 진짜 헤어지 인사를 나눈다. 고작 20여분이나 만났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찡까.


차를 몰고 주차장을 떠나면서 혹시나 싶어 백밀러를 본다. 할아버지가 계속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꼬마도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다운타운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그제서야 아차, 싶은 생각이 다. 떠나는 마음이 바빠 사진을 한 장도 같이 못 찍은 게다. DSLR 카메라 꺼내기 힘들었으면 스마트폰으로 그냥  찰칵 했으면 되는데.


여행서는 담아올 기억이 많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그렇고 풍경이 그렇고 진기한 자연이 그렇다. 지만 그런 장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사진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에 젖초록색 “부산갈매기” 기억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런 선입견도 없이 낯선 이를 반겨마음 함께. 마도 그날 나는 미국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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