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핑하다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황해문화라든가 무슨 월간지 편집장 하는 사람의 개인 사이트다. 무심코 들렀는데 두번 놀랐다. 첫번째는 문학, 미술, 사진, 영화....등등 콘텐츠가 방대해서 놀랐다. 두번째는, (이런 규모의 컨텐츠는 대개 무작위로 수집한 것들이 많은데) 대부분 내용들이 웹사이트 주인 손으로 직접 쓰여진 것처럼 보여서 놀랐다. 그런데 오늘 그 웹사이트에서 성래운 선생이 지으신 동시를 보았다. 까마득히 잊고 살던 무엇이 핀처럼 내 마음을 찔러왔다. 성래운(成來運).... 입 안에서 선생의 함자를 조용히 불러본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은사도 아니요 그에게서 과목을 배운 바도 없다. 군대 다녀와서 복학한 1984년. 철과 피의 강압통치를 계속하던 전두환 정권이 유화 제스추어로 소위 학원자율화를 실시한 첫 해였다. 한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선생을 인터뷰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선생이 살고 계신, 낡은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서 이뤄진 인터뷰. 그는 당시 두번째 강제해직(한번은 유신정권, 그 당시는 전두환정권)을 당한 야인 신분이었다. 나는 한나절동안의 인터뷰 내내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선생에게는 약대의 털을 두르고 석청을 씹으며 광야에서 외치는 어떤 예언자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교육자이기 전에, 뜨거운 열정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시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생이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나를 가장 감동시킨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제가 소학교를 졸업했을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도저히 중학교 월사금을 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당시 고향 충청도에서 돈 안내고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았는데, 그게 일본인 학교였어요. 한번이라도 우등상을 놓치면 장학금이 안 나오기에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를 할 밖에 도리가 없었지요. 그러니 학기마다 우등을 도맡아 한 우등생이 될 수 밖에요. 한마디로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한치의 의문 없이 머리 속에 쏙쏙 받아들인 모범생이었지요. 당시 담임을 맡으신 분은 오카모도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선생님이 기숙사에서 공부하던 저에게 자기 집으로 찾아오라는 전갈을 주셨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러는가 싶은 생각에 허둥지둥 선생님 댁을 찾았지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안은 물처럼 조용한데, 오카모도 선생님이 방 한가운데 일본정장을 입으시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계신 게 아닌가요? 깜짝 놀라 덩달아 무릎꿇은 십대 소년에게 그 일본인 선생님은 이렇게 충격적인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선생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 자네에게 충고한다. 자네는 지금 제 나라를 힘으로 강점하고 총칼로 수탈하며, 백성의 목숨을 임의로 처분하는 침략자를 찬양하는 교육을 받고 있다. 자네가 진정 사람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지금 학교를 자퇴해라. 그리고 네 민족을 위한 옳은 길을 찾아서 그 길로 떠나라!" 말씀을 계속하는 성래운 선생의 눈이 아득히 깊어졌다. "돌아오는 길은 마치 술이 취한듯 휘청거렸어요. 열 몇 살짜리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오카모도 선생의 말씀은 감당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기숙사 방에 돌아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그 정신적 혼란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이 어린 제자에게 차마 하기 어려운 절절한 인간의 충고를 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은 따라야 한다는 결심이 점점 굳어지더군요. 문제는 말이지요,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의 장학생은 임의로 자퇴를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건 심각한 범죄행위에 해당되는 것이었어요. 들어올 때 그런 약조를 하고 입학한 이상 철저하게 일제신민으로서의 식민지교육을 이수하라는 일종의 노예계약 같은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둘 수 있는 단하나의 방법은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는 진단서를 첨부하는 길 뿐이었습니다. 고민 고민 끝에 저는 휴일을 빌려 큰 누이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뒤안으로 가서 간장독을 열고 조선간장을 큰 한바가지 펐어요. 숯이 둥둥 떠있던 그 짜디짠 조선간장. 저는 숨도 쉬지않고 그 간장바가지를 단숨에 마셨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죠. 간장이나 고추장 같은 것을 순식간에 많이 먹으면 마치 폐결핵에 걸렸을 때와 똑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어요. 당시에 가장 무서운 병이 폐결핵. 그 증상과 유사한 고열과 기침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거였는데, 실제로 간장 한 바가지를 먹고 학교로 돌아온 저는 곧바로 신열에 들뜬채 혼수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학교의무실이더군요. 교의가 청진기를 갖다대고 진찰을 했습니다. 제 어린 마음은 '부디 폐결핵 진단이 내려지기를..." 이라는 간절한 소망뿐이었지요. 그러나 교의는 단지 일주일간의 입원 안정을 처방내릴 뿐 더이상의 진단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소년이었던 저는 더 이상의 시도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말씀을 마치신 선생의 눈이 어느새 발갛게 젖어있었다. 내 눈도 역시 그러했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해 여름, 제자가 참 길을 걷기를 희구하는 간절한 마음에 한 식민지소년에게 인간의 충고를 해준 일본인 선생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어버린 일대 계기였다고.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그 말이 내 안에 들어와 지금도 살아있다. "현실에만 머무르지 마십시오. 참 인간의 길을 걷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그것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발행된 잡지를 들고 다시 선생을 찾은 날. 육순이 넘은 노선생과 스물 다섯 살의 청년은 (사모님이 덥혀주신) 청주 댓병 하나를 다 비우며 통음을 했다. 잔을 건네면서 선생은 신동엽의 산문시(1)를 암송해주셨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낭송을 듣는 나의 심장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내 나라에 대한 꿈처럼 따스한 낙관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각, 버스가 끊어져서 원효대교를 걸어서 넘으면서도 머리 속에 내내 선생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성래운 선생의 시 낭송은 당대의 화제였다. 암흑의 시대였던 80년대 초중반 민주화 모임의 꽃이었다. 이육사, 김지하, 문익환의 시가 맑으면서도 굵은 선생의 저음으로 흘러나오면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절창(絶唱)이었다.몸이 떨려오는 어떤 감동이 있었다. 선생이 암송한 시는 100 여 작품에 달했다. 그리고 그 모든 낭송은 하나같이, 원작이 지닌 의미에 더하여 마술과 같은 힘과 향기로 되살아나는 또하나의 생명체였다. 양성우의 <겨울공화국>을 노래할 때는 그 준엄함이 서릿발 같았고,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할 때는 마치 천장에서 푸른 별들이 쏟아지는 듯 했으니 말이다.
성래운 선생의 시 낭송 모습
1985년 5월이었던가. 광화문 옛 서울고 근처에서 열렸던, 사진작가이자 벙어리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박용수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선생이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낭송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는 머리푸른 청년에 불과한 나를 친구로 받아주셨다. 백낙청 선생, 백기완 선생, 이문구 선생, 박용수 선생 등 좌중의 모든 이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2차로 들른 생맥주집을 나와, 광화문 대로변에서 나이차를 넘어 이십 여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그후 몇 년, 결혼을 앞두고 나는 선생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선생은 완곡하게 부탁을 거절하시면서 "요즘 내가 몸이 많이 안 좋아..."라고 하셨다. 건강상태를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어두운 예감이 들어왔다. 그렇게 전화대화 나눈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이 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빈소가 차려진 세브란스 병원은 문상객으로 인산인해였다. 그 겨울 밤, 병원 마당의 차양 아래서 막걸리를 마시며 나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학연도 지연도 세상의 외형적 인연으로는 나와 아무것도 나눈 것 없으나,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준 내 마음 속의 스승을 애도하면서.
선생의 빈소
아래는 <바람구두...>에서 옮겨온, 성래운 선생이 지으신 동시다. 삼십 여 년 전 그때, 선생이 학교에서 혹은 재야에서 온몸으로 시대를 부딪히며 감당하셨던 '사람 가르치는' 직업이 이제 나의 것이 되었다. 동시를 읽으면서 선생이 걸어가셨던 길을 다시 생각해본다. 가르치는 일의 의미가 새삼 어깨에 무겁다. <달라질래요> 성래운 우리 반 동무들은 모두 달라요. 얼굴도 다르고 키도 달라요. 모두가 똑같아지면 우스울 거야. 우리 반 동무들은 모두 달라요. 생각도 다르고 재주도 달라요. 모두가 똑같아지면 우스울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라서 좋고 오빠는 언니와 달라서 좋아요. 서로가 똑같으면 우스울 거야. 나는 나는 동무들과 달라질래요 오빠와 언니와도 달라질래요 모두 똑같으면 우스울 거야. 나는 나는 이 세상의 누구와도 달라질래요. 달라져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