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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Dec 24. 2019

인연의 무게

1.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놀란 것은 내가 이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지금껏 하나도 안 읽었다는 확인이었다. 지난 십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에 대하여 얼마나 의식적, 무의식적 외면을 했던가를 스스로 검증한 셈이다.


잘 읽히는 책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오딧세이아의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Cyclops)에 이르기까지 스토리 텔링이 대단하다.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과하게 무게를 잡지 않는다. 그렇다고 몰입이 어려울 정도로 냉정하지도 않다. 그의 책이 왜 잘 팔리는가의 이유가 분명했다.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라는 것. 그러니 낯선 곳에 도착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반겨주라는 것. 그들이 떠날 때까지 편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라는 것. 이것이 직업군인의 맏아들로 태어나 평생 떠도는 여행의 삶을 살아온 김영하가 몸으로 배운 인생의 비밀이었다.


2.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 대목은 본문이 아니었다. 말미에 붙은 <작가의 말>이었다. 거기에 자기 가족(주로 아버지)이 키웠고 무지개 다리를 건너 보낸 반려견 이야기가 나왔던 게다. 암에 걸려 일어서지도 못하는 마르티스를 동물병원에 데려간 이야기. 차마 함께 들어가지 못한 아버지가 안락사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온 작가에게 던진 다음의 말.


"참 못할 짓이다. 이제는 이런 일, 더는 못할 것 같다."


마음을 준 존재를 영원히 이별하는 고통을 압축한 말이다. 김영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개와 고양이를 반려라고 생각하면 너무 애닯다고. 무슨 반려들이 이토록 자주, 먼저 떠나느냐고.

마루의 커다랗고 순한 검은 눈동자가 내 눈앞에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3.
2006년 겨울. 수원 역에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한참 들어간 변두리 동네. 캐벌리어 동호회에서 분양 공고를 봤을 때만 해도 반드시 강아지를 들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세미나 다녀오는 길에 수원행 표를 끊은 것도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못 피할 인연은 결국 못 피하는 것이었다.


기억이 선하다. 뿌옇게 김이 서린 마루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올망졸망 뛰어다니던 강아지들이 딱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12개의 눈망울이 일제히 낯선 이를 향했다. 태어난 지 6주 정도 되었다 했다. 어떤 녀석은 금방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장난질, 어떤 녀석은 낑낑대며 의자 아래로 숨었다. 


그 중 하나가 꼬리를 흔들며 구르듯 내게 다가왔다. 흰색, 검은색, 밤색의 긴 털이 부드러운 트라이컬러의 캐벌리어 킹 찰스 스파니엘 숫놈. 앞발을 잡아주니 낑낑 뒷다리로 힘을 주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까맣게 반짝이는 보석 두 개가 거기 있었다.


그렇게 녀석을 만났다. 주인이 마련해준 강아지 가방에 마루를 넣고 부산까지 KTX를 탔다. 강아지 가운데는 유난히 멀미를 타는 녀석들이 있다. 마루가 그랬다. 집에 도착해서는 기진맥진 뻗어버렸다. 그리고는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잤다.


4.
성품이 어진 녀석이었다. 낯선 이를 봐도 짖을 줄을 몰랐다. 정이 차고 넘쳐서 아들과 딸아이를 혀로 햝아주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점잖고 착한 표정 뒤에는 넘치는 에너지도 있었다. 산책을 하면 아무리 “천천히 천천히”를 외쳐도 목줄이 팽팽해지도록 앞으로 앞으로 밀고 나갔다.


산책시간은 주로 늦은 밤. 아파트 옆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가 목표지였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에 이르러 목줄을 풀어준다. 그러면 마치 로켓처럼 맹렬히 땅을 박차고 뛰었다. 뒤쪽에서 먼지가 풀썩이며 일어날 정도로.


마루가 우리와 같이 산 것은 1년 반 정도. 그러다가 도저히 키울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수소문 끝에 한 다리 건너 아는 선생님 한 분이 아메리칸 코카스파니엘 암컷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강아지의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산과 강이 있는 부산 외곽의 마당 있는 단독주택. 그곳에서 오랫동안 강아지를 키운 경험이 있는 분이라 했다. 안심이 되었다.


억지로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루가 집을 떠나는 날은 차마 아이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녀석이 떠난 후 초등학생 딸아이가 받은 충격이 컸다. 말수가 적은 오빠는 덤덤한 듯 보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내게 한 다음의 말을 보면 결코 범상히 강아지를 보낸 것이 아니었다.


“저는 앞으로 절대 강아지 안 키울 거예요”


5.
선생님과 자주 전화를 할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기는 했다. 드물게 통화를 할 때도 마루 이야기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남의 집에 갔으니 그 집 식구로 잘 살아야 한다는 표면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소식을 알면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잘 지내는지, 새로 만난 강아지랑은 싸우지 않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마루가 우리 집에 온 둘째 날 찍은 사진. 액자 속에서 빤히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동자를 보면서 잘 있겠지 잘 있겠지 그렇게 궁금증을 달랬다.


녀석을 키워주신 선생님께 전화를 한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마루 나이가 열 두 살은 되었을 터. 강아지의 수명이 그러하니 혹시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자그맣게 마음속에 들어온 그 생각이 커지고 커져서 억누를 수가 없었다. 녀석이 내 얼굴을 알아나 볼까. 왜 이제야 왔냐고 혹시 원망을 하지는 않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6.
발신음이 들리고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마루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예 어떤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들었다. 암컷 강아지가 3년 전에 집 앞에서 차에 치어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그리고 마루는 그 후에 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했다고.


“지금은요...?”


암컷이 세상을 떠난 후 1년쯤 지나 마루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야생의 늑대는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그것을 알아 무리를 떠난단다. 무리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강아지 중에도 그런 녀석이 있다고 덧붙이신다. 아마 마루도 그렇게 산 속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휴대폰을 잡은 내 손이 떨렸다. 목소리가 잠기고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 깊이 말려들어가는 소리로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7.
김영하의 말이 맞다. 한 생명을 만나 인연을 맺고 그것을 떠나보내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다. 더구나 그 인연을 내 품에서조차 보내지 못하는 것은. 


언젠가는 우주의 아득한 시공간 속에서 마루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녀석에게 뭐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까.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너를 보내서 미안하다고... 그때도 녀석은 괜찮아요 괜찮아요 환하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어줄까. 


아래는 마루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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