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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4. 2020

그해 봄 그리고 겨울



1.
논산훈련소 전체에 부식을 제공할 정도로 납품사업 규모가 컸고 커다란 외제 세단이 있었던 어릴적 우리 집. 누나들은 회상한다. 집안을 일으킨 것은 어머니였다고. 깡통 두들기는 거지한테 찬밥 주지 못해 굳이 기다리게 했다가 뜨거운 밥 지어주던, 눈물 많은 내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 떠나신 후에도 군대 다니던 외갓집 형들이 휴가 나오면 자기 집보다 우리 집을 먼저 찾던 생각이 떠오른다. 왜 그런지 몰랐는데 6남 1녀 외갓집 남매 중 위의 세 형들한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어머니가 대학 학비를 다 대셨다고 한다. 형들에게는 고모의 그런 마음이 사무쳤던 것이다.

그렇게 품이 넓으면서도 다정다감했던 어머니에게 정서적으로나 사업 수완에서나 아버지는 모든 걸 의존하셨다고 한다. 집안의 사업이 기울어지고 정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기점이었다. 아버지의 정신적, 사업적 타격을 막아내고 회복을 도울 아무런 방도가 없었던 게다.

벌이는 사업마다 망하고 망했던 아버지는 결국 빚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기사회생을 위해 강원도로 떠밀려가셨다. 4살 위 형과 나는 큰누나 집에 합가했고.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지금은 장로교 목사가 된 L군이 교실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쉬는 시간에 종교를 주제로 한 논쟁이 붙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중2짜리들 수준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딴에는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 일요일에 홀린 듯 친구가 다니는 교회라는 곳을 스스로 찾아갔으니. 그렇게 "그분"을 처음 만났다.

내가 난생 처음 속했고 세례를 받은 교회는 S교회.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자리 잡은 초보수파 장로교회였다. 아마 지금도 대구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일 게다. 그 교회에는 지리적 특성 상 서문시장의 가난한 상인들이 많았다. 인근에 거주하는 신도들의 경제적 사정도 오십보 백보였고.

외로운 사춘기 소년이 마음 둘 곳이 세상에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니 교회가 나에게 사회적 소속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S교회는 신도들의 때 묻은 주머니에서 내놓은,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을 바탕으로 몸집을 부풀린 교회였다.

철철이 온갖 명목의 헌금이 요구되었고 그러한 돈이 쌓여가던 곳.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교회에서 가장 빈번히 행해지던 설교 주제는 이랬다. “너희의 재물을 지상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그렇다고 교회공동체가 행해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봉사와 책임을 실행하는 곳도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종다수를 이루는 곤궁한 신자들에게 퍼부어지는 교조적 레토릭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지상에서 행복 찾지 말고 천국 가서 복락 얻으라”는 설교에 대한 거부감이 내 안에서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교회의 정체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드링크 팔 듯 천국을 <판매하여>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이 말씀이 과연 예수의 말씀인가? 이 교회가 진정한 예수의 교회인가?

영국의 문예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암스는 <계급의식>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자란 계급적 환경에 따라 스스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이자 사회적 소속의식이라고.

내가 세상의 권력과 분배구조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을 어릴 적부터 가지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 문예반 친구들과 독회를 통해 서툴게나마 사회비판 서적을 몇 권 읽은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한 내 눈에 비친 S교회는 세상보다 더 일그러진 세상이었다. 입만 열면 천국의 영광을 앞세우던 곳. 하지만 그 안에서는 오히려 세상보다 더 강고한 차별과 분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세상의 악화된 복제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도사가 서울에서 새로 부임했다. 여러 대에 걸친 유명한 기독교 가문 출신이었다. 얼굴 윤곽선이 가느다랗고 피부가 유난히 뽀얗던 사람. 목소리조차 나긋나긋했던 그의 이름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격렬한 논쟁도 했다.

곱게 자란 환경 탓이었을 게다. 이 전도사에게는 세상을 구성하는 불평등과 불의 그리고 가난한 신도들의 현실적 고통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다. 그 당시 교회를 둘러싸고 진행되던 현실은 미숙한 내 눈으로도 묵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내가 지닌 문제의식 자체를 이해할 원천적 능력이 없었다.

장로교에서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들은 대개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세고 부유한 사람들이 맡는다. 사회적 위치와 교회 직분이 상호상승작용을 일으켜, 교회 안팎에서 존경을 받고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비산동 직물공장 사장이 있었다. 어린 우리들 귀에도 소문이 들려왔다.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룬다고. 근로기준법 준수는 커녕 지독한 인간적 모욕조차 서슴치 않는다고. 금은방을 하는 또다른 장로에 대한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 날 교회 안에서 만나는 이들의 모습은 거룩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엄숙과 경건이 머리 위에서 발 끝까지 물처럼 흘러내렸다. 바리새적 외식의 극치였다.

힘든 노동의 한 주일을 끝내고 모인 가난한 신도들. 그들이 간절한 소망으로 바치는 소중한 재물들이 고작해야 목사와 장로들의 속된 권위를 높이는데 쓰여 지다니. 무조건적 교회 확장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되다니. 사람들의 현실적 고통을 불식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죽은 다음의 천국에 대한 희망으로 대체시키다니, 이 교회야말로 마취제 같은 존재가 아니냐?

사춘기 소년의 이러한 격렬한 항의와 질문에 대하여 전도사는 꿀먹은 벙어리였다.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한도 내에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마도 그때 내가 던진 칼날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핍박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초짜 전도사에게 어찌 세상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해답이 있었겠는가. 그와 나 둘 다 십자가의 참 의미를 몰랐다. 예수의 삶과 죽음의 올바른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결코 없었다. 말씀이 타락한 곳에서는 그렇게 모두가 숨이 막히는 것이다. 갈 곳 모르고 함께 암흑 속을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3이 될 때까지 회의와 불신이 이어졌다. 논쟁을 통해서도 기도를 통해서도 부흥회를 통해서도 문제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교회의 문제점은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더욱 크게 부풀어져만 갔다. 하지만 그분은 언제나 침묵하셨다. 그곳에는 그가 없었다. 위엄으로 가득찬 예배당 천장에도 강대상 위에 높이 매달린 십자가에도 없었다. 날마다 지쳐 잠드는 혼곤한 꿈속에도 없었다.

칼바람이 밤새 불어댔으니 한겨울이었을 게다. 밤늦게까지 기도를 하다가 집에 들어갈 시간을 놓쳤다(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교회 성가대석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며 선잠을 자다가 새벽에 깨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를 했다. “왜 당신은 응답이 없으십니까. 날마다 부르짖는 간구에 대해 왜 한마디 대답도 없으십니까?”부르짖었다.

겨울 새벽, 예배당을 가득 채운 그 어둡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침묵하실 뿐이었다.

현실에서의 환경은 더욱 엉클어져가고 부서져갔다. 대구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나이는 벌써 환갑. 사업적 재기는 애당초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가혹한 가난이 엄습해왔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빠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세상의 어두운 뒷골목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길거리의 싸움들에 휘말려들어갔다. 고등학생 주제에 소주병을 대접에 가득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취해 널부러진 채 그분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되뇌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디에도 구원의 빛은 없었다. 세상은 열 아홉 살 나의 영혼을 향해 강철 감옥이 짜부라들 듯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신은 존재하시는가? 만약에 그가 계시다면 이 세상에 널려있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왜 내버려 두시는가? 그것을 배태시키는 이 만연한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왜 놓아두시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있다면, 이런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고 침묵만을 지키는 그런 존재는 절대로 제대로 된 신이 아니실 것이다!(이 절규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나는 다시 이십 수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하여 그 밤이 왔다. 당시 S교회는 기존 교회당을 허물고 몇 배나 더 큰 건물을 짓고 있었다. 외골격을 다 세우고 내장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때의 내 눈에 그 엄청난 규모의 교회당은 이렇게 보였다. 천국의 거짓 나팔소리로 현실의 고통을 마취시킨 포상으로. 가난한 신자들의 고혈을 빨아 쌓아올린 위선과 거짓의 성전으로.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예배당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떠나는 결별의 기도를 드렸다. 계단을 내려왔다. 북쪽으로는 가물가물 작은 전등불들이 반짝이는 가난한 동네의 언덕. 그곳을 향해 건물 끄트머리에 섰다.

이제 교회는 내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신은 없다. 만약에 그가 계신다 해도 다를 바가 없다. 땅위에서 웅크린 인간의 처절한 고통에 대하여 끝내 침묵하는 당신과 나는 화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 그리고 천천히 교회를 빠져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2.
대학 1학년을 마친 1980년 2월말. 휴학을 하고 대구로 다시 내려왔다. 재수를 해야겠다 결심했다. 봉산육거리 근처에 입시학원들이 몰려있었다. 그 동네에 초등학교 동창생의 형님이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단과를 들으며 골목길 2층의 구석진 공간에 자리 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해 1월에 양평에서 언더서클(그때는 대학 운동권 모임을 그렇게 불렀다) MT를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이름을 들었다. 12월 12일에 쿠테타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5.16에 이어 탱크가 다시 한강을 넘었고 군인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도 들었다.

대구로 내려오면서 나의 마음을 움켜쥔 것은 그러한 소용돌이치는 현장을 피해왔다는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눌렀다. 다 잊자고, 동굴에 들어간 곰처럼 1년만 고생하자고.

마침내 5월이 왔다.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반란과 비상계엄에 저항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폭발했다. 서울에서 친구들이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나는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문장을 해석했다.

같은 달 14일로 기억된다. 낮 두시 쯤이었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멀리 큰 길에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골목을 뛰어가는 수십 명의 다급한 발소리. 창문 아래에서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내밀었다. 내려다보이는 바로 아래에서 전경들이 누군가를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어린 여학생이었다. 이마 위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순간 갑자기 머리 위로 피가 확 쏠렸다. 있어야 할 곳에 없었고 해야 할 일을 피했다는, 억눌렀던 자책이 터져나온 것이리라. 나는 문제집을 접어 가방에 쌌다. 그것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거리로 나섰다(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그 가방을 되찾을지는 꿈에도 생각못한 채).

대구 시내는 시위대의 물결이었다. 저녁이 되자 학생들은 경북대학교로 집결해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북문 쪽 언덕배기 실내 체육관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두어 달 전 친구가 서클 선배라고 소개한, 경북대 간호학과 3학년생이었다. 밤새 시국토론이 이어진 끝에 다음날 정오 대구역 광장에 재집결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귀가하니 아버지가 안 계셨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메모도 남기지 않은 채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왔다. 약속된 낮 12시에 대구역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정보가 새나갔던 모양이다. 이미 광장은 전경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하나둘씩 모여든 학생들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싶었다. 그녀와 함께 뜻을 모았다. 30분 후 반월당에서 시위대를 재집결시키자고. 그렇게 동성로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귓속말로 알렸다. “반월당 네거리”. “다시 집결!”이라고. 재수하겠다고 내려온 놈이 시위 주동자가 되다니.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반월당 네거리에 천 여 명의 시위대가 다시 집결했다. 대열의 선두에서 주먹을 높이 들었다. 집에 가서 갈아입은 옷이 아래 위로 모두 흰색 점퍼와 면바지였으니 오죽 눈에 잘 띄었겠는가.

구호를 선창했다. “독재 타도! 계엄 철폐!” 거대한 함성이 거리를 진동했다. 어깨동무를 한 대열이 계산성당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중간쯤 넘어서는데 전경대가 길을 막아섰다. 다시 봉산동쪽으로 대열을 선회했다. 그런데 이미 반월당 쪽에서도 길을 차단하고 밀고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겁먹은 시위대 한명이 대열을 이탈했다. 그러자 썰물 빠지듯 대열이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대로 옆 골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이 나도 몸을 피해야 했다. 골목 안에는 뒤따라 진입한 전경과 시위대가 뒤엉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곁눈으로 스치면서 남산동 쪽 출구로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전경 대여섯 명이 여학생 하나를 짓밟고 있었다. 흘깃 여학생이 입은 옷이 눈에 띄었다. 연한 분홍색의 꽃무늬 원피스였다. 그날 그녀가 입은 그 옷!

왜 그랬을까. 정의감도 아니고 영웅심도 아니었다. 분홍색 원피스를 본 순간 그냥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뜀박질을 멈추고 발길을 되돌렸다. 돌아서자 마자 검은색 방호복 전경의 등짝을 향해 사정없이 온몸을 날렸다.

터진 입술, 멍든 얼굴로 잡혀간 곳은 (당시 사대부고 근처에 있던) 남부경찰서. 그녀를 포함해서 열 두어 명 정도가 함께 끌려왔다. 그런데 경찰서 분위기가 이상했다. 잡혀온 학생들에게 한마디도 뭐라 하지 않았다. 형사들이 유치장 옆을 왔다갔다 하는데 눈빛이 묘했다. 측은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옆에 있는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훈방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너는 그냥 골목길을 지나다가 대열에 휩쓸렸다고 이야기해라. 절대 시위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해라.” 도리질을 치던 그녀가 끝내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그녀가 풀려나간 것이 저녁 8시쯤. 밤이 깊어가는데도 경찰들의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 불안감이 커졌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경찰서 마당에 트럭 한 대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유치장 문을 열더니 우리를 트럭으로 몰고 갔다. 지붕이 덮인 육군 트럭 옆, M16 소총에 착검을 한 군인들이 서 있었다. 신병을 인계받더니 모두에게 눈가리개를 씌웠다. 덜컹거리며 차가 출발했다. 초병의 암구호가 들리고 30여분을 달리던 차가 섰다. 함께 탄 감시병이 눈가리개를 풀어줬다. 사방이 서늘하고 조용했다.

그때 갑자기 트럭 뒤쪽 덮개가 확 열렸다. 서치라이트가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조명이었다. 그리고는 “내려!”라는 짧고 나지막한 명령. 억지로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서치라이트의 역광 아래 트럭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수십 명의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손에 1미터 가까운 곤봉을 들고. 트럭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질근질근 씹듯이 낮은 목소리로 그들중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

욕설을 신호로 곤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군화발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숨이 턱 막혔다. 오물이 가득한 취사장 하수구의 시멘트 바닥을 높은 포복으로 기게 했다. 개처럼 등을 짓밟으면서. 순식간에 바지가 찢어졌다. 무릎의 살갗이 훌렁 벗겨졌다. 그리고.... 상상을 할 수 없는 폭력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아침이 되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수용 바라크(baraque)에 내던져졌다. 지옥과 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강당을 개조한 가로 30미터 세로 6, 70미터 정도 되는 공간. 흐릿한 전등불 아래 풀썩풀썩 솟구치는 붉은 색 먼지를 배경으로 백 수십명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맨 앞줄에는 팬티만 입힌 채 무릎 꿇어진 대여섯 남짓 남자들. (나중에 알고 보니) 대구 지역 대학교 학생회장들이었다. 그들의 등짝 피부 전체가 한 치 빈틈도 없이 새카맣게 죽어있었다. 피멍이었다.

자해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허리띠와 신발을 압수했다. 수용바라크 창문의 유리창을 다 빼버려서 텅 빈 공간으로 바람이 무시로 넘나들었다. 그곳(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풀려난 다음에야 50사단인 줄 알게 되었다)에서 석방된 것이 7월 초순. 두 달여에 걸친 암흑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어떤 서류도 영장도 없는 명백한 불법 감금. 내가 잡혀 들어간 날이 5월 15일이었고 그날 서울에서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일어났다. 30개 대학 10만명이 모인 시위대가 해산한 틈을 노려, 한밤에 주요 대학 학생회가 공격을 당했고 연행자가 대거 발생했다.

그리고 다음 다음날인 5월 17일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발표되었다. 정권 찬탈이 개시된 것이다. 야당 정치인과 시위 주모자 체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신군부가 짜놓은 치밀한 각본에 따른 진행이었던 게다.

마침내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의 막이 열렸다. 공수부대원에 의한 잔혹한 시민 살육. 그에 대응한 광주시민들의 자위적 무장.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9일 간의 처절한 싸움 끝에 광주는 신군부의 발 아래 처참히 유린당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당시 대구 시내에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한다. 일순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진 200여명에 달하는 젊은이들. 그들의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던 게다. 극단적 언론통제 아래 광주에서 시민살육조차도 비밀에 붙여졌던 시기였다. 그러니 군부대에 잡혀 들어간 청년들에 대한 처우가 어떠했겠는가. 상상하기도 힘든 잔혹한 일을 그 안에서 겪었다.

거의 매일 보안사의 집요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나는 신분이 모호했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휴학생. 더구나 학보사 기자 출신. 그들 눈에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방패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었다. 재수하려 고향 내려왔다. 어쩌다가 시위를 조직하게 되었다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정말 손바닥도 안 되는 음식만 주어졌다. 새벽에 깨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끊임없는 가혹한 육체적 압박(군대에서 을찰이라 부르는)이 가해졌다. 바라크를 둘러싸고 3, 4미터 간격으로 착검한 군인들이 빙 둘러 감시를 한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어느 날 새벽. 악몽에 시달리다가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서 잠이 깨었다. 동이 휘뿌윰하게 터오고 있었다. 바람이 사정없이 실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바라크 주위에는 오래된 포플라 나무들이 둘러서 있었다. 높고 기름한 그 나무의 가지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새소리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맑고 슬픈 소리로 울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잡혀있던 동안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번도 그 같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말도 안 되는 무엇이 들어왔다.  "저 소리가 혹시 그분의 목소리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마음이 떠올랐을까.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나는 1년 반 이상을 그분을 새까맣게 잊고 살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를 철저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던가?

설사 저것이 그분의 목소리라 치자. 그렇다면 그분은 이런 참혹 속에서 도대체 왜 나를 찾아오신 것인가? 이 상황에서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엉뚱한 생각이 옅어지는 바라크 안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7월 초순에 풀려났다. 주소지였던 서부경찰서의 서장실에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간난신고 끝에 내 소재를 알아내셨고, 그후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 끌고 50사단 정문 앞에 오셨던 아버지. 침묵하는 보초병에게 내 생사를 묻고 또 물었던 아버지는 마음이 떨리셔서 차마 그곳에 못 오셨다. 대신 막내고모가 나를 데리러 왔다.

5월 15일에 갈아입고 나갔던 흰색 옷이 검붉은 잿빛으로 변했다.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채, 무릎이 다 찢어진 피묻은 바지를 입은 나를 보자마자 고모가 울음을 터뜨렸다. 경찰서장이 보든말든 가방 속에서 두부를 꺼내더니 허겁지겁 나에게 먹였다.

그해 봄의 사건은 당시 스무 한 살 내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비린내 나는 고통의 기억은 점점 엷어져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랜 동안 나는, 그 새벽 내가 들었던 새소리를 잊지 못했다. 착검한 소총 뒤에서 들리던 그 소리는 도대체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것은 나를 찾아오신 그분의 음성이었을까.

하지만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흐릿했다. 내가 그분을 만나고 그 존재를 실감하기까지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군대에 가기 전 모질게 추운 겨울, 나는 드디어 너무나 명백하고 확실하게 그분을 만나게 된다.

3.  
석방 후 한동안은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는 게 우선이었다. 다행히 젊은 몸이었다. 회복이 빨랐다. 집안에서만 지내던 한 달 여가 지나자 외출을 시작했다. 잡혀있는 동안 광주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철벽같은 언론통제 때문에 자세한 진상은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를 통해 어렴풋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봄 광주에서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세계 10대 회고록으로 꼽히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 프리모 레비. 이태리 출신의 유태인 화학자이자 작가인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다. 그리고 평균 생존기간 3개월의 지옥을 뚫고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레비는 자신처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상처는 마르지 않는 악의 샘이다. 그것은 가라앉은 자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그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영혼의 빛을 꺼뜨린다.”

레비는 1987년 스스로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 인간이 인간을 대량 살육하는 끔찍한 세상과, 그것을 허락한 신(神)에 대한 절망을 끝내 이기지 못하였기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 특히 그것이 저항불가의 거대한 악에서 뿜어져 나온 것일 때 고통은 이렇게 한 인간을 완전히 파멸시켜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봄이 그러한 충격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때까지 믿고 있던 견고한 합리의 세계는 성전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듯 사라졌다. 스무 한 살 청년이 의지해왔던 모든 사고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역사는 진전한다는 것. 사람의 모듬살이를 지배하는 것은 악(惡)이 아니라 선한 의지라는 것. 그러한 모든 신뢰가 파괴된 집처럼 폭싹 내려앉았다. 그 폐허 위에 지독한 악령이 시커먼 입을 벌린채 웃고 있었다.

의지 가지할 데가 없었다. 갈 곳이 없었다. 내 개인에 대해서는 그리 하셔도 좋다. 하지만 이것은 범위와 의미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지독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수 천 수만의 몸서리치는 비명이 울려퍼지는 이런 세상을 향해 신은 왜 침묵을 지키시는가? 만약에 그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온존시키실 리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나를 물고 뜯었다.

아무리 부정했어도 겨자씨만큼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짜부라지듯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절망과 허무가 차지했다. 이러할 때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을 잊기 위해 세상을 탐닉하고, 밑바닥까지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일 뿐이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돈이 없으니 깡소주가 대부분이었다. 푼돈이 생길 때마다 동네 선술집으로 갔다. 친구를 만날 때는 대구백화점 뒷골목으로 갔다. 이천 원 짜리 싸구려 안주 시켜놓고 거의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셨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아버지와 내가 살던 집은 잡풀과 포플라 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비산동 언덕 위. 아래 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곳이었다. 쓰러질 듯 빈약한 나무 기둥에 붉게 녹슨 양철지붕, 두 세대가 공동화장실을 쓰던 낡고 초라했던 그 집. 하지만 스무 평 남짓 마당이 있었고 가슴 높이 나지막한 블록 담이 있었다.

잠이 일찍 깨곤 했다. 그런 새벽이면 마당으로 나가 담벼락에 고개를 얹고 철로를 내려다보았다. 축축하고 차가운 안개가 점령군처럼 밀려왔다. 바람이 불면 안개 속에서 솟아오른 포플라 나무가 물고기들이 몸을 뒤집듯 천천히 잎사귀를 뒤집었다. 청회색의 어둠을 가르고 멀리서 기차가 달려왔다. 그리고 마당을 우르르 뒤흔들고 멀어져갔다. 아득하고 쓸쓸한 날들이었다.

해가 바뀐 1월의 어느 추운 날. 인생이 가장 비참하던 겨울, 홀로 밤길을 걸었다. 칠곡군에 속한 산속 골짜기 한 초등학교에 선배가 근무했다. 그를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산 속 마을로 들어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다. 할 수 없이 산을 넘어야 했다. 몇 번 걸어본 길이었다. 그믐밤이었지만 희미하게 길이 떠올라 보였다.

나지막한 산의 정상을 넘어가는데 숨이 찼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산자락 천수답의 마른 논배미에 희뿌연 것이 보였다. 수확을 끝내고 묶어놓은 높이 1미터 정도의 네모반듯한 낟가리.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웠다. 차가운 바람이 귓불을 얼리는 듯했다. 하지만 자근자근 땀이 배어나온 터라 오히려 볏짚의 감촉이 좋았다.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넋을 잃었다. 눈 앞에 엄청난 것이 펼쳐져있었던 것이다. 은하수였다.

어두운 밤 깊은 산 속에서 하늘을 본적이 있는가? 그곳에 펼쳐진 셀 수 없는 별들의 반짝임에 놀란 적이 있는가? 요즘은 대기공해 때문에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오염되지 않은 하늘이 있었다. 유리알처럼 쨍한 겨울하늘. 그곳에 펼쳐진 장대한 별들의 물결. 몸이 굳어버릴만큼 압도적 장면이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뛰어들었다. "은하수를 구성하는 저 별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은하계 자체. 그렇다면 저 많은 은하들이 어떻게 한 치의 충돌도 없이 제 갈길을 가며 완벽하게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인가? 저 가없는 별들이 과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고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일까?“

강렬한 부정이 솟아났다.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계실 것이다. 저 하늘과 별과 우주를 만들고 움직이시는 누군가가. 나의 생명을 만들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누군가가!

바로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백만의 별들이 무슨 생명을 얻은듯 기우뚱, 일제히 기울어졌다. 그러더니 파도처럼 일제히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어떤 존재가 나에게 이렇게 물으시는듯 했다. 엄청나게 큰북이 울리듯 그 소리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네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느냐?”

산자락을 휘몰아가던 겨울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낟가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절로 무릎이 꺾여 바닥에 엎드렸다. 입술을 떼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안으로 말려들어 성대를 막아버린 듯 했다. 그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웅얼거리는 신음 뿐.

몸이 떨리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샘물이 터진 것처럼 끝도 없이.

사춘기 시절, 곤궁과 절망에서 구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끝내 침묵하시던 당신. 내 모든 소망을 외면하시던 당신. 나의 젊은 인생을 그토록 모질게 다루신 이. 내가 세상의 수레바퀴 아래 만신창이로 짓이겨질 때조차 침묵하셨고, 그리하여 원망과 저주 속에 내가 먼저 외면해버린 존재.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만큼 힘이 빠진 자리, 허물어지고 허물어져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끝난 자리, 나의 십자가에 매달려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처절한 고백이 나오는 그 자리에만 오시는 분.

그이가 마침내 나를 찾아오신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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