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규 Apr 24. 2021

강순일 선생님


1.
드르륵 교실 앞 문이 열렸다. 쿠당탕거리며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먼지 풀썩이던 교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반장인 내가 일어섰다. 차렷 경례! 그런데 선생님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입을 꼭 다물고 우리들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기만 하시는 게 아닌가. 교실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10여초가 흘렀을까. 선생님이 입을 떼셨다.

“모두들 책을 덮어라.”

아이들이 저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대학에서 비트켄슈타인 철학을 전공하고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시던 강순일 선생님. 교과서 진도 틈틈이 헤세를 이야기하고 윤동주를 이야기해주던 선생님 모습과는 분위기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이 평생에 남는 말이 될 줄 그때 나는 몰랐다.

“선생은 딴따라가 아니다.”

내가 다니던 S중학교는 보수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던 곳.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에 입을 모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가를 부르고 주마다 한번 교목(校牧)의 성경 공부 시간이 있던 곳. 하지만 (훨씬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학교 운영이 비리로 점철된 문제적 학교였다.

이 학교의 전통 중 하나가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 즈음 열리는 음악발표회. 바로 직전 시간에 대강당에 모여 그 발표회를 했던 게다. 전교생을 한 자리에 모아서 특기 별로 발표를 시켰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도, 바이얼린을 켜는 아이도, 합창단의 공연도 있었다.  

음악회 프로그램 중 마지막 순서가 있었다. 강당 전면에 의자를 놓고 학생들 마주보며 앉아있던 선생님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지금은 곡목이 생각나지 않는) 노래 하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기독교 계열의 노래였다. 일생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더 크신 분을 받들겠다는 내용의. 표면적으로는 신에 대한 헌신이지만 기실은 학교에 대한 충성 서약이었다.   

학생들 앞에 교사들을 일제히 일으켜세워 이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는 이유는 뻔했다. 워낙 문제가 많은 학교였으니 이런 기회에 예방책으로 선생들 '야코'를 죽이는 것. 그것도 학생들 앞에서 선생들의 굴종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아무리 재단이 전횡하는 사립학교라 해도 비상식적 장면이었다. 한 목소리로 ‘충성맹세’를 하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편했을 리 있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2줄로 의자에 앉아있던 사오십여 선생님들이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중앙에 앉아있던 한 사람만이 석고로 빚은 듯 한 치 흔들림이 없는 것이었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팔짱 낀 채 정면을 응시하며 앉아있던 사람. 바로 강순일 선생님이셨다.

강당 안에 저릿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사회를 보던 것은 학생회장이던 같은 반 친구 H. 평소에 변죽이 좋았던 녀석이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 선생님께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끌며 말했다.

“선생님 일어나시죠.”

후일 어른이 되어 H와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그날의 이야기가 나왔다. 녀석이 하는 말이 이랬다.

“팔을 슬쩍 잡는데 선생님이 나를 딱 노려보시는 거라. 그리고 한 마디도 안하고 조용히 팔을 뿌리치는데, 와 그 동작이 너무 단호하고 선생님 팔이 무슨 쇳덩이 같더라.”

깜짝 놀라 H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수십 명의 선생님들이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강순일 선생님은 팔짱 낀 부동의 자세로 앞에 있는 학생들만 바라보셨다.

나는 대열의 중간쯤에 멀찌감치 앉아있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눈에서 번쩍거리는 무슨 빛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개탄도 슬픔도 분노만도 아닌 그 모든 감정들이 하나로 모여 소용돌이치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바로 그 다음 시간이 국어시간이었던 게다. 중3짜리들이 무얼 알겠는가. 그 기이한 장면이 펼쳐진지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그 일을 다 잊어버렸다. 그저 친구들끼리 쿵닥거리기에 바빴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선생님이 위의 말씀을 던지셨던 게다.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대학 졸업하면서 사춘기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었던 희망이 이 순간에 시작되었다. 후끈한 땀 냄새 풍기며 몸과 마음이 자라나는 아이들. 그 정처 없이 휘몰아치는 에너지에 탈출구를 열어주는 것.

장식장의 보석 아닌 것은 모두 돌멩이로 취급하는 부박한 세상, 하지만 진짜 건물의 기초가 되는 건 반짝이는 보석이 아니라 큰 돌맹이라는 걸 알려주는 일. 선생이란 직업은 결코 남의 장단에 굴복하여 춤이나 춰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에둘러 먼 길을 돌아왔으나 결국 가르치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게 된 출발점이, 바로 그날 오후 중학교 3학년의 교실이었던 것이다.

2.

빚잔치를 치르고 아버지가 강원도로 재기하겠다고 떠나시고 내가 형과 함께 큰누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것이 초등 6학년 때부터. 험난한 사춘기 초입에 접어드는 시절이었다. 예민하고 복잡했던 소년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학을 만난 것이 선생님 덕이었다.

3년 동안 담임은 아니었지만 줄곧 선생님께 국어를 배웠다. 강순일 선생님은 자기 반이 아닌데도 나에게 유난히 잘해주셨다. 등록금도 제 때 못낼만큼 상황이 어려웠지만 수업이 끝나면 개인적으로 불러서 늘 격려를 주셨다. 학교 가까이 공설운동장 옆 중국집에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신 기억도 난다.

처음에는 헤르만 헤세를 소개받았다. 자기 책을 직접 빌려주신 <데미안>. 많은 이들이 비슷한 고백하듯, 몸과 마음이 소년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던 그 시절 나에게 심대한 영향을 준 소설이었다.

지금까지 열 번 정도는 읽었을 게다. 그 때마다 내가 경험한 삶과 세상의 깊이에 비례해서 늘 새로운 각성을 준 작품.

이 책에서 가장 오랫동안 새겨진 대목은 주인공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인연이 아니었다. 배화교를 믿던 교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만남이었다.

싱클레어와 함께 불을 피우며 밤을 지샐 때 그가 던진 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그때 외운 이 유명한 문장을 (중학교 2학년 때니 정확한 의미를 다 알 수야 없었지만)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모닥불 피우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헤세 읽기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 그 당시 큰누나네 집은 동촌의 방직공장 근처, 철거덕 철거덕 방직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서 울리던 방 안. 그 어둑한 공간에서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었던가. 페스트가 세상을 찢어발기던 중세 말엽 한 청춘이 통과하는 육체와 영혼의 지옥과 천국, (헤세 소설에서는 이례적일만치) 적나라했던 그 에로틱한 묘사들 말이다.

또 <수레바퀴 밑에서>는 어땠던가, <황야의 이리>는 어땠던가, <유리알 유희>는 어땠던가. 소년은 선생님이 열어주신 문을 밀고 상상도 하지 못하던 책 속의 큰 세상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여린 깃털의 날개가 솟아났다. 그렇게 좁은 방을 벗어나 하늘을 날았고 들판에 가득한 꽃향기를 맡았다.   

그 다음은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선생님의 소개였다. 처음 입문한 것은 <죄와 벌>.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의 고뇌를 이해할 만큼 내 인식이 성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개인의 삶과 세상과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 안에서 개인의 자아와 양심은 어떻게 형성되고 굽이치는가에 대한 서툴지만 강력한 대리체험을 시작했다.

<백치>와 <악령>을 거쳐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진입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역시 처음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났던 <죄와 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책 읽기는 계속 가지를 뻗어갔다. 갈증난 나무처럼 문학이라는 물기를 빨아들이며, 줄기와 잎이 끝없이 하늘로 향했다.      

선생님은 아주 인상적인 미남이셨다. 173~4센티 정도 키에 눈썹이 굵고 짙었다. 부리부리 잘 생긴 인도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부터 검도를 계속해서 당시에 공인 3단. 몸이 강철같이 단단했다. 앞서 말한 대강당 사건에서 친구 H의 팔을 뿌리칠 때, 꼭 쇳덩이 같았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던 게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간간이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내가 나온 한 해 뒤에, 학교 재단에 강력한 경고를 하신 후 자발적으로 S중을 그만두셨다는 이야기.

그 난해한 언어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남문시장에서 이불장사를 시작하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장사가 크게 성공해서 어느 백화점에 점포를 내셨다는 소문들이 바람결에 들려왔다(정말 선생님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던 것은 고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이어진 질풍노도의 시간. 선생님의 이름을 까마득히 잊고 몇 년을 살았다.

내가 그이를 다시 뵌 것은 1981년 초봄, 몸과 마음이 완전히 허물어진 채 그저 다가오는 입대를 기다리던 시점이었다. 대구 동성로를 걷다가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도 기억난다. 검은색 모직 잠바를 입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정면을 응시하며 성큼성큼 걸어오시던 그 모습이.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알아봤다. 나야 선생님 얼굴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만, 얼굴도 몸도 크게 달라졌을텐데 나를 어떻게 단번에 알아보셨을까.

“너 동규 아니냐?”

6년만의 재회였다. 이제 자기보다 키가 더 커진 제자의 손을 붙잡고 선생님은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내 여유 시간을 물었다. 안 바쁘면 자기 집으로 가자고. 가서 김치 보시기에 막걸리라도 한 잔 하자고. 그렇게 선생님과 만남의 제 2막이 시작되었다.

3.
선생님 댁은 대명동에 있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놀랐다. 50여평 가까운 아파트의 거실을 따로 구획해서 서재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큰 공간의 삼면이 천장까지 책장이었다. 그리고 주제별로 작은 팻말 붙여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

(따지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닌데) 페이지가 접혀 책상 위에 놓인 책 제목을 보고 더 놀랐다. 동학농민 혁명을 다룬 내용이었다. 들려주시는 말씀이 최근에 근대사 공부를 다시 시작하셨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손이 닿는 근처 서가를 메운 수십 권이 모두 경제사, 사회사 등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을 거쳐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역사책이었다.   

장사 하는 사람이 일 마치고 돌아오면 혼자 공부를 하시는 거다. 그것도 취미로 읽는 수준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연구목표를 정해서. 선생님은 까까머리 중학생을 가르치던 시절에서 전혀 변하지 않으신 거다. 오히려 공부의 품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신 거였다.

최근에 무궁화백화점 2층에 서점을 인수하셨단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고. 책 파는 것도 좋지만 시간 여유를 내어 하고 싶던 “내 공부”를 하려 한다고.

대화가 이어졌다. 빈 막걸리 병이 세 개나 바닥에 내려졌다. 80년 봄을 지나면서 내가 통과한 어두운 경험.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았던 그 악몽들, 입을 열면 유령처럼 되살아나 나를 삼킬 것 같던 이야기들이 처음으로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앞이었으니까.

선생님도 자기 마음을 여셨다. 그 중학교를 왜 떠났던가. 그리고 이후 어떠한 세상의 비바람을 맞으며 지금까지 오시게 되었던가를. 저녁 나절에 사모님이 돌아오셨다. 그 시간에는 세월을 건너며 끊어졌던 사제관계가 다시 단단히 이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선생님을 재회한 것이 1981년 3월 말. 같은 해 5월 18일에 나는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다. 그 한달 반 동안 사흘에 한 번씩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다. 내가 주로 서점을 찾아갔다. 저녁이면 백화점 근처 향촌동 선술집에서 소주를 많이 마셨다. 매번 선생님이 술과 밥을 사셨다.

그러나 내가 그이에게 더 크게 받은 것은 마음이었다. 20여년 이상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선생님은 나를 친구이자 어른으로 받아주셨다. 입대를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시고 등을 두들겨주셨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의지가지 할 곳 없던 그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을 게다. 입대 전 전날에  찾아 뵙고 이제 간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선생님과 헤어졌다.

4.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다. 하지만 방학 중에나 며칠 대구를 찾으니 선생님을 자주 뵙지는 못했다. 서점 사업이 고전을 겪고 있다는 걸  중간에 직감했다. 특히 사모님이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찬 시절, 세월이 그저 바람처럼 뛰어갔다.

졸업 후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나는 우여곡절 끝에 광고회사에 입사를 했다. 그렇게 결혼을 앞두고 선생님께 주례 부탁을 드렸다. 몇 번이나 곡진히 사양하시다가 허락을 하셨다.

수성못 근처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 우리는 한복을 입었다. 선생님도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아래 사진이 주례사 전 생각에 잠기신 선생님 모습이다.  

이후 나는 광고회사 최초의 노동조합 결성에 관여했다. 더욱 선생님께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간에 몇 번 사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업이 사정없이 기울어가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생각하면 마음이 꽉 막히는 듯 했다. 하지만 당시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노조 관련으로 직장을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광고업계에 암암리에 나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돌았던 모양이었다.

재취업에 애를 먹다가 힘들게 자리를 잡았다. 늦깍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내 문제에 정신없는 동안 선생님과 연락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후 5, 6년이 지났다. 생각해보니 그 긴 시간동안 안부전화를 한번도 드리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무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던가.    

정신을 번쩍 차린 것은 1999년 대학에 들어오고 난 직후였다. 그동안 선생님을 얼마나 잊고 살았는가가 알아진 거였다. 핸드폰 번호를 찾아서 눌렀다. 없는 전화번호로 나왔다. 사모님 번호를 눌렀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구 전화번호부에도, 114 안내에도 선생님 이름은 등재가 되어있지 않았다.

깜짝 놀라 중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무도 연락이 안 된다는 거였다. 선생님이 크게 아끼던 한 해 후배가 있었는데, 수소문해도 그 친구의 소재를 알 수가 없었다. 마음 한 모퉁이가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후 몇 년동안 온갖 방법을 다해 선생님의 연락처를 찾았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8순을 넘기셨을 연세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죄를 짓게 될 것 같다. 선생님 다시 만나 뵙고 큰 절 드리고 싶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아서 죄송하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키워주신 마음에 한 번도 제대로 보답한 적 없는 저를 부디 용서해주시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그해 봄 그리고 겨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