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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Jan 02. 2020

어떤 관념주의자의 몰락

사실은 오후까지 진중권에 대한 A4용지 넉 장 분량의 초고를 쓰고 있었다.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는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 들이 최근 진중권의 강변을 확대재생산하는 흐름이 뚜렷한 정파적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초고의 제목은 <어떤 관념주의자의 몰락>.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 배신

인류학자 타이거와 폭스는 보은의 망(報恩의 網 : web of indebtedness)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인간이라는 포유류가 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간 기본적 동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말한다. 타인에게 받은 호의를 다시 되돌려주는 상호작용이 있음으로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구석기인의 경우를 들어보자. 자기가 사냥한 결과물을 다른 구성원과 나누지 않고 탐욕스레 독점하는 경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먹이동물의 행로를 예측할 수 없으니, 사냥감을 마주칠 기회는 우연적이고 부정기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호부조를 거절하는 개체들은 결국 공동체에서 배척되고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남에게 받은 호의를 되돌려주는 보은의 DNA를 지닌 후손만이 살아남는 진화론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게다.


하지만 예외적 존재들이 있다. 얻어먹기는 하되 결코 되갚는 법이 없는 자들. 함께 밥 먹고 계산할 때 신발끈 다시 묶는 자들. 술자리 파할 때가 되면 기절한 척 하는 사람. 이런 자들은 결국 좌중의 따돌림을 받게 된다. 증세가 심각한 경우에는 배은망덕한 종자라 손가락질을 당한다....“


그런데, 저녁에 jtbc 토론을 보고 글을 쓸 이유와 목적이 사라져버렸다. 진중권 스스로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이어졌기 때문이다. 개탄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중권이 강변하는 것과 달리 언론자유는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존재하는 순백의 개념이 아니다. 현재의 맥락에서 한국 언론이 자기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어떻게 남용하며 사회적 의제를 얼마나 왜곡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문제의식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오늘 같은 궤변을 늘어놓아서 안 되었다.


지난 몇 년동안 <jtbc 신년토론>의 시청률은 평균 10퍼센트를 상회했다. 오늘 토론도 수백 만 명이 동시에 시청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천하에 공개된 중계방송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새삼스레 한 인물의 바닥을 확인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몰락도.


오늘 토론을 통해 공적인 영향력 지닌 인물로서 진중권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난 것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인간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관점을 일말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타인에게 존중받을 수 있으랴.


태극기부대와 "조국기 부대"를 병치시키는 저 저열한 집착이 어찌 공중의 눈에 용납될 수 있으랴. 공공재로서 전파를 개인적 억하심정 토로에 이처럼 소모하는 사람을 참아줄 미디어는 앞으로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그를 높이 평가하고 주요 인사로 모시기 시작한 조중동 계열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이벤트의 소산이든 실제 지적 능력이든) 일종의 진보적 여론 스피커로 영향력을 지녔던 자가 지극히 협애한 개인적 관념과 집착에 사로잡혀, 더구나 그것을 시민들에게 강요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들려져 "지적 꼰대"이자 기득권의 옹호자로 변신하게 된다. 전형적 사례가 한때 운동권의 스타였으나 관념적 생명주의를 부르짖으며 몰락해 간 김지하의 길이다.


지금 기득권 핵심으로서 검찰과 하이에나 언론의 열렬한 옹호자로 변신 중인 진중권이 걸어가고 있는 바로 그 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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