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런던과 함께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이 생긴 도시입니다. 100년을 훌쩍 넘는 역사답게 이 지하철들은 매우 낡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냉방이 안되고 창문을 열고 달리는 열차 구조입니다.
우리나라나 이웃 일본처럼 커다란 LCD전광판 안내는 언감생심. 덜컹거리는 소음 때문에 역명 안내는 거의 안 들리지요. 그러니 차 내에 붙은 열차노선도를 집중하지 않으면 내리는 역 놓치기 딱 쉽습니다.
아마도 런던지하철(tube라 불림)보다 차량 내부가 크고 덜 붐비기 때문이겠지요. 파리에는 기타나 바이올린 혹은 아코디언 연주하는 사람들이 객차 내에 꽤 많습니다. 최고급 연주는 아니지만, 늦은 밤 숙소로 들어오면서 듣는 생음악이 적지않이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 줍니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을 보러 페흐 라쉐즈 묘지에 다녀오는 지하철 안. 염소수염 예쁘게 기른 젊은 아코디언 연주자가 귀에 익은 음악을 들려주는군요.
분명히 아는 샹송인데, 이름이 안 떠오릅니다. 지하철에서 듣는 아코디언 연주라, 사흘만에 이제사 진짜 파리라는 기분이 납니다(소액이지만 감사의 마음으로 기부함).
영국과 프랑스는 전통적인 라이벌이자 우방국. 하지만 도버해협을 경계로 오랫동안 쌓아온 정치경제적 경험 차이 때문에 풍토와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게 느껴집니다.
표면적으로 딱 감이 잡히는 건, 철도 등의 공공시설에서 앵글로색슨 나라 영국이 조금 더 깨끗해보인다는 것. 파리 지하철은 어두운 선로 내부 벽에 그래피티 낙서가 가득합니다. 열차가 씽씽 달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에서 어떻게 저 많은 라커를 뿌렸을까 괜히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거리 분위기는 프랑스가 어딘가 모르게 개방적이고 한 뼘 더 풀려있습니다(여행 말미에 독일 갈 예정인데, 유럽을 대표하는 이 세 나라의 거리풍경 비교도 재미있을듯^^).
광고와 커뮤니케이션 가르치는 제 눈에 한가지 더 띄는 것은 프랑스의 경우 대중교통수단에 상업광고가 적다는 것이지요. 영국보다는 아무래도 사적 자본이 휘둘러 대는 힘이 약하다는 증거일까요? 사진은 그 중에서 파리 전역의 지하철에 유난히 많이 붙어있고 그만큼 유난히 튀는 광고입니다.
저는 각국을 여행하면서 광고를 통해 그 나라의 고유 코드를 해독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광고야말로 특정 사회의 특징을 칼로 자르듯 보여주는 <문화의 창>이니까요. 자본주의 발상국 영국과 사회주의 전통이 면면한 프랑스를 문화경제적 차원에서 구별짓는 상징적 기표 중 하나도 광고입니다. 우선 표현적 특징에서 그런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 프랑스 광고의 주인공은 귀여운 팬더곰. 팬더는 WWF의 심볼마크로 활약하는 녀석입니다. 그렇게 전면에 딱 버티고 서서 WWF(세계자연보호기금 : World Wide Fund for Nature) 깃발을 휘두르고 있네요. 1961년 창립된 WFF는 각국의 NGO들이 힘을 합친 국제적 비정부기구지요. 수자원, 토양, 천연자원을 보호하는 범 세계적 캠페인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동물 보호에 뜨거운 열정을 보이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 단체의 모든 광고는 메시지가 심플하고 함축적인 비주얼이 돋보입니다.
광고를 한번 보세요.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이 아주 재미있지요? 팬더곰이 질끈 밟고 넘어서는 것은 시가전에 등장하는 바리케이트입니다. 부서진 담장과 벽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네요. 팬더 옆에는 총 대신 자전거 핸들 잡고(친환경 교통수단을 상징하는 것) 실크햇 쓴 흑인청년(인종적 다원주의를 대표?), 영어 구호 새긴 티셔츠 입은 백인 청년, 꼬리를 흔들며 팬더에게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 ^^
아이디어 소재와 구도를 보면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여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도 보고 역사책의 파리코뮌 사진에서도 본 지극히 프랑스적인 장면입니다.
팬더가 목놓아 외치는 헤드라인을 대충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환경에 대한 모욕을 멈추고 우리의 지구를 지키자!"
왼쪽 하단에는 이 작품이 유명광고상을 수상했음을 알리고 있군요. 그런 정보가 아니더라도 매우 뛰어난 크리에이티브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패러디 유머와 판다로 상징되는 환경오염 및 동물보호 메시지가 절묘하게 결합되어있으니 말입니다.
유머광고의 전통적 달인으로 영국사람들을 많이 꼽습니다. 하지만 같은 유머라 해도 이 광고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단순한 메시지 전달을 넘어 그 배경에 프랑스만의 탄탄한 역사의식을 깔고 있어서입니다.
제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술과 문화와 패션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가 사실을 알고보면 유구한 혁명과 투쟁과 저항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가장 빈번히 이용하는 공공시설인 지하철,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징적 코드라 할 수 있는 광고에서도 예외없이 그같은 저항과 전복의 기의가 녹아있는 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파리의 낭만 뒤에 숨어있는 프랑스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