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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2. 2020

마르크스 무덤을 찾다





런던에서는 기상예보가 쓸모가 없다. 아침마다 인터넷으로 <오늘 날씨>를 확인하고 나오지만 예보가 맞는 경우는 절반도 안된다. 올여름은 특히 예상 밖의 비가 많다. 7월 말에는 잉글랜드 남부에 엄청난 폭우가 내려 홍수사태가 일어났다. 런던에도 이틀 걸러 한번씩 비가 내린다. 하지만 오늘은 눈이 쨍할 정도로 하늘이 맑다. 바람결에서 더위가 살짝 느껴질 정도다. 이례적인 날씨다.  


마르크스 무덤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미리 하이게이트(highgate cemetery)  묘지 위치를 파악해두었다. 런던 지하철 노든라인(nothern line)의 하이바넷(high barnet)지선을 타고 올라가면 2존과 3존 경계에 아치웨이(archway) 역이 있다. 역에서 나와 언덕을 쭈욱 걸어 올라가면 묘지가 나온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 역사를 빠져 나온다. 동서남북을 헤아려본 다음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길이 가파르다. 몇 분 안 가서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10분 쯤 걸어 올라갔는데도 도무지 묘지 비슷한 곳이 보이지를 않는다. 안되겠다 싶어 길 가는 할머니한테 위치를 다시 물어본다. 그랬더니 거꾸로 언덕을 200미터 쯤 내려가서 공원을 관통해야 하이게이트 공동묘지가 나온다는 거다. 오리가 연못에서 꽥꽥거리고 동네 어른들이 벤치에서 책을 읽는 공원을 한참 걸어나오니 차가 다니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묘지는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 두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마르크스 무덤은 그 중 동편 묘지(east cemetery)에 있다. 묘지 문을 들어서자마자 왼쪽의 안내소에서 여자(처녀인지 아줌마인지 잘 구별이 안가는)가 나온다. 2파운드의 입장료가 있다는 거다. 엽서까지 두어 장 산 후 묘소 위치를 물으니 안내소를 지나 그냥 쭈욱 내려가란다.


10.26과 5.18을 겪으며 20대를 통과한 우리 세대에게 이 유태혈통 혁명가 이름은 가슴 속에 새겨진 하나의 불도장이었다. 세상에 나와 살기 위해 헉헉댄 대부분 시간 동안은 아득한 옛사랑의 그림자같은 것이었고. 그러므로 런던을 찾아와서 마르크스를 만나러 가는 발길은, 아픔이라고도 서글픔이라고도 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뒤엉킨 감정을 내게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전 세상 떠난 친구 무덤에 꽃 들고 찾아가는 심정이 이럴까.


마르크스 묘소는 비스듬히 경사진 길을 따라 정문에서 약 100여미터 내려간 공원 동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창한 대리석 좌대 위에 마르크스의 청동두상이 놓여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좌대 위쪽으로 <공산당 선언>에서 나온 그 유명한 구절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가 금박을 입힌채 음각되어있다. 


아래쪽에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인용한 ”철학자들은 단지 세상을 이모저모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is to change it.)“ 라는 문장이 같은 글씨체로 새겨져있다.  


이 무덤은 마르크스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아내 제니, 셋째 딸 엘레노어, 하녀 헬렌 데무스 등 6명이 묻혀있는 일종의 가족묘지다. 묘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좌대와 두상까지 합한 전체 높이가 3미터에 육박한다. 마르크스가 생전에 자기 묘비가 이렇게 거창하기를 바랬을까. 좀더 소박하고 담백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비 뒤쪽으로 돌아가본다. 문득 고개를 드니 청동두상의 왼쪽 귀 아래에 거미줄이 두 개나 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장대하고 화려한 묘비와 그 위에 쳐진 거미줄. 우연히 마주친 이 장면이 내 기억 속에 영화의 한 컷처럼 박혀있다. 지난 1세기 동안 마르크스 사상이 미친 세계사적 영향력과 그것에 침을 뱉듯 뒤이은 현실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선명한 상징으로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거미줄을 떼어내주고 싶었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이다.  


묘비 앞에는 흩어진 꽃잎들과 붉게 타오르는 장미꽃다발 하나가 놓여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증거이리라. 앞서 와서 서성이던 두 남자는 말소리를 짐작컨대 동구권에서 온 사람인듯 했다. 나보다 10분 정도 늦게 묘비를 찾아온 50대 초반의 여성은 핀란드에서 왔다고 한다. 그녀에게 사진 한장 찍어달라 부탁한 후 묘비 옆에 섰다. 


일주일 전 캄덴시장에서 디지털카메라를 소매치기 당한 후라 일회용 필름카메라로 찍었다. 동방에서 온 나그네의 모습이 마르크스 얼굴 옆에서 수십만 번째일까 수백만 번째일까, 기록되었다. 묘지에서 보낸 시간은 1시간 정도. 사진 몇장을 찍었을 뿐 대부분 시간은 마르크스 묘소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다른 이들의 묘비명을 읽었다. 


오랜 기대 혹은 예측과 달리 마르크스 무덤을 보는 내 마음은 담담했다. 오히려 코 끝을 찡하게 한 것은, 그의 무덤을 둘러싸고 묻혀있는 혁명운동가들의 묘비와 그에 새겨진 문장들이었다. 묻힌지 수십년이 된 것도 있고 최근에 조성된 무덤도 있었다. 마르크스 묘비에서 2미터도 안 떨어진 바로 왼쪽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여성운동가의 무덤이 ‘아버지’ 곁에 묻힌 딸처럼 잠들어 있다. 


좁은 길을 건너면 쿠르드공산당 창시자를 비롯한 여러 혁명가들의 무덤들이 모여있다. 어떤 묘비명은 아랍어로 새겨져서 뜻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영어로 새겨진 대부분의 글은 고인들이 평생을 두고 부딪혔던 투쟁의 목표가 “아직은” 달성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나 죽으면 마르크스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본인의 유언을 따랐던 것일까. 아니면 동지들 뜻을 모아 이곳에 영원의 몸을 누이게 한 것일까. 상세한 내력을 알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모국의 정치적 환경을 생각해볼 때 대부분이  세상을 떠날 당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런던에 망명중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들이 죽어서까지 가까이에 묻히기 원했던, 사상의 아버지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무덤 가운데 마르크스가 평생을 살았고 멀지않아 프롤레탈리아 혁명이 폭발하리라 예상했던 서구 제국 출신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랍, 남미 등 이른바 제 3세계 운동가들의 무덤이 대부분이다. 마르크스가 일찍이 <공산당 선언>에서 외쳤던 말과는 정반대로, 유럽에서는 그의 사상 자체가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증거일런가.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생명을 얻어 살아있는 곳은 생전에 마르크스의 주목을 멀찌감치 벗어나있던 저 변방의 나라들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에 망명을 했고 1883년 3월 14일 64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애의 절반 이상을 말 그대로 신산(辛酸)의 망명 생활로 보낸 셈이다. 오늘 하이게이트 묘지 한 모퉁이에 묻힌 저 제3세계 운동가들의 삶도 마르크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묘지 한 귀퉁이에 앉아 그들이 걸어갔을 인생을 떠올려본다. 아프고 쓰라렸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애를 던진 목표가 살아 생전 달성되리라는 희망은 까마득했을 슬픈 망명자의 삶. 이들의 평생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지.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형태를 한참 뛰어넘어 극한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세계적 투기금융자본의 위세. 그 독이빨에 수억 명의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가는 광풍을 본다면 마르크스는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묘지 구석구석 묻혀있는 이 사람들의 영혼은 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여름 한낮의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묘지. 나무그늘 사이로 누군가의 노래인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나는 살았고 싸웠고 죽어간 이들을 애도하는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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