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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2. 2020

국경을 넘는다는 것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 인터라켄을 거쳐 이제 프라하를 향합니다. 강행군입니다.

유레일 야간 열차가 너무 힘들어 프라하 들어가기 전에 바이에른주 북서쪽, 체코와 가까운 뉘른베르크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그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열린 곳이지요.

11시 넘어 도착한 기차역 앞은 완연 분위기가 거칠군요.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본 광경 하나. 3미터 앞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걸어가는 커플. 마주오던 흑인 청년들 중 한 녀석이 커플 남자의 어깨를 주먹으로 세게 치고 지나갑니다. 황당한 폭력이지요. 그런데도 위세에 눌린 탓인지 남자는 그저 움찔 걸음을 재촉할 뿐.

맥주 사러 다시 찾은 기차역 근처에는 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백인, 흑인, 터키계 청춘들로 가득합니다. 어딘지 흔들리며 뿜어 나오는 그들의 에너지가 강렬하네요. 자정이 넘었는데도 역사 안에 경찰 여러 명이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며칠 전 뉘른베르크 인근 소도시에서 터진 폭탄 테러의 영향일까요. 여행 다니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유럽이 상당부분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러한 문화적 격동과 충돌이 사회 저변에 꿈틀대며 숨어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곤히 잤습니다. 아침을 먹고 숙소 앞에 나가 아이폰으로 거리 풍경을 찍어봅니다. 아래쪽 첫 번째 사진이 점심녘에 버스 타고 프라하로 넘어갈 터미널입니다.

오전 11시 50분. 뉘른베르크 역 앞에서 2층 버스 탑승. 도시 하단 인터체인지에서 동쪽으로 선회. 6번 고속도로를 따라 3시간 반을 동진하면 프라하입니다.

예전에 몇 몇 나라를 각각 왔을 때는 실감을 못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9개국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보니까 정말 (EU체제의) 유럽은 국경 없는 하나의 나라입니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엄격한 짐 검사와 여권 체크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대륙으로 넘어오면 국경선은 형식입니다. 세관이고 뭐고 없어요. 유레일 열차에서는 그냥 한번쯤 표 검사만 합니다(그래도 독일 들어올 때는 기차에서 여권 보여줌) 도보로 국경을 넘는 경우에도 “Hi!” 고개 끄덕여 인사만 하면 끝이니까요.

예를 들어 바젤(Basel)은 프랑스 북동쪽에 있는 스위스 접경도시. 몽블랑 빙하를 만나러 인터라켄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합니다. 근데 역 건물이 두 나라 국경선 정 중앙에 지어져 있는 겁니다. 물론 역사 건물 내에 형식적 국경 초소(라기보다는 탁자와 의자 놓인 자그마한 데스크)는 있지요. 하지만 그냥 경찰에 눈인사만 하면 상황 완료.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스페인에서 17, 8살 먹은 고등학생들이 커다란 배낭에 샌달 끌면서 각국을 돌아다니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유레일 패스 개시했던 파리 리옹역 창구에서 만났던 폴란드 고등학생 3명(그 중 하나는 2002 월드컵에선가 맞붙은 폴란드팀과의 축구 경기를 이야기하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기는 미국 NBA팬이라고^^). 바르셀로나 타파스 식당에서 만났던, 수줍은 표정의 아이슬란드 소년.

하지만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방은 (역설적으로) 세계 최대의 군사력이 밀집된 “비무장지대”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 이러한 환경과 의식 상태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어딘가 가슴 두근거리고 긴장이 되는 경험입니다.

식민지와 이념 충돌에 따른 가혹한 분단 경험이 주는 일종의 사회문화적 DNA가 뿌리박혀있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식민지와 분단 이후 한국 사람들이 후천적으로 가지게 된 하나의 특징적이며 억압적인 사회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이름을 따로 <국경의식>이라 붙여봅니다.

이런 정서를 가장 첨예하고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으로 시작되는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고 한발짝만 나와 보면, 우리 안에 또아리 틀고 있는 그러한 “국경에 대한 어딘가 비틀린 억압감”이 정치상황과 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주입된 유령임을 알게 되지요.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권리와 행위, 무엇보다 그러한 행위에 대한 시민 개개인의 자의식은 특정 사회가 보유한 자유의 순도를 측정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이기 때문입니다.

총 맞아죽은 옛날 대통령이 공포의 철권을 휘두르던 시절, 독재 권력이 한사코 국민들이 국경을 자유로이 넘지 못하게 통제한 이유 또한 그 때문이고 말이지요.

문제는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된 오늘날도 그 같은 심리적 억압이 (우리 세대는 물론이고 젊은 세대들에게조차 일정 부분) 온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군사, 정치, 외교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 상황에서 <통일의 그날>이 오지 않는 한 우리 마음 속에 그늘진 그같은 심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을 해 봅니다.

언제 그날이 올까요. 부산역에서 설렁설렁 기차를 타고 (평양역 간이음식점에서 후루룩 냉면 한 그릇 해치우고) 신의주를 지나며 만나는 중국 검표원에게 안녕하세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날.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일체의 억압감 없이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만주와 시베리아와 세계를 마음껏 휘젓고 달릴 그 날이. 유럽은 되는데 우리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요.

고개를 드니 차창 밖으로 독일 동부의 울창한 숲이 휙휙 지나갑니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나를 어쩔 것인가 싶습니다. 멀리 나와 천지를 떠돌고 있는데도 늘 사고의 한 머리가 내 사는 땅을 향하고 있는 이 고질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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