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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4. 2020

일본인 제자 이야기


저녁 먹고 인터넷 검색하다가, 우연히 일본 이바라키현과 도쿄의 조선학교 여학생들이 합창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아래 위 검은 한복 치마저고리 입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채 한 입술로 통일 노래 부르는 아이들. 그 티없는 표정 밑에는 그러나 고향 떠나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애잔한 슬픔이 어쩔수 없이 배어있다.

가슴 한 구석이 싸아하게 아려온다. 이런 장면 보며 울컥하는 것은 가족을 포함한 핏줄에 대한 애착이 많은 내 개인사 때문일 게다.

자연스레 오늘 학생과 면담한 내용이 떠올랐다. 지난 학기부터 우리 과에 일본 여학생 2명이 유학을 왔다. 한명은 아키다견(犬)으로 유명한 열도 북쪽의 아키다현에서. 한 명은 한반도와 마주보는 동해 연안 도토리현에서. 부모 떠나 먼 땅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이 아이들이 안쓰러울 때가 많다. 지난 학기 초에는 아직 외국인등록증이 나오지 않은 탓에 카드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 아이들 대신해서 교재를 사주기도 했다.

그 중 한명인 00는 한국어 등급이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고등급인 6급이다. 공부 마치고 돌아가면 한국어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다. 이것저것 애로사항 듣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이 크게 어둡다.

물어보니 그저께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일본의 친구와 문자를 주고 받고 있었단다. 당연히 히라나가와 카타카나를 써서. 근데 옆 자리에서 그 모습 지켜보던 (안면이 전혀 없는) 여학생 하나가 갑자기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계속해서 퍼붓더라는 게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일본말 문자 주고 받는 것을 보고. “일본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이다. 저항도 못하고 그저 당하기만 했단다.

아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앞에서 한숨을 푹 내쉰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며 낯이 붉어진다. 뒤를 이어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솟구친다. 분노다.

“어떤 놈인지 기억하니?”

“처음 보는 학생이었어요.”

고개를 푹 숙인 아이에게 애써 위로를 건넨다. 어느 나라에서건 짐승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에도 혐한 부르짖는 재특회가 있지 않느냐. 한국에도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속한 인종, 나라, 민족, 언어의 껍대기만을 보고 악령에 사로잡혀 나쁜 말과 행동 하는 인간 말종들이 있다.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애써 무시하고 잊어버려라. 그리고 혹시라도 다음에 그 녀석 마주치거든 바로 내 연구실로 뛰어와서 누군지 알려주거라.... 그렇게 위로를 건네는 내 말이 자꾸만 더듬거렸다.    

아이가 나간 다음 소파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가슴 속에 지펴진 분노의 불씨가 점점 커진다. 일본인 아니라 일본인 할애비라도 그렇지, 갓 스물 넘은 대학생이 제 나라에 공부하러 찾아온 외국친구에게 이런 짓을 할만큼 엉뚱하게 비뚤어져 있다니.

아무리 좌절하고 억눌려도 마음 속 분노의 물꼬를 자기 바깥의 "타자"에게 이같은 방식으로 터뜨려서는 안된다. 이런 행동을 하고도 동포들이 다른 나라에서 민족차별과 인종차별 받는다고 분노할 자격이 있을까. 일본의 저질 극우세력을 욕하고 비판할 자격이 주어질 수 있을까.

학생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체 학생에게 특별교육을 시켜서라도 국적불문 외국인 학생 대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요청을 했다. 보직자회의에서 사건을 알리고 대책을 만들겠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얼마 전부터 학교 안에서도 수면 아래 극우그룹들이 서서히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는 답변을 들려준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리다고 배척하고 멸시하고 공격하는 악한 마음들. 최소한의 상식과 인간애조차를 무참히 짓밟으며 대학 안에까지 밀려들어오고 있는 시대의 광기를, 00가 마주치고 내가 마주친 것이다.  

수업에 다시 들어갔다. 맨 앞줄에 앉은 00의 얼굴이 여전히 어두웠다. 하루 종일 잊혀지지 않는 그 얼굴이 조금 전 인터넷에서 마주친 조선학교 여학생들 모습 위에 자꾸만 겹쳐진다.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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