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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 Feb 26. 2016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스마트  폰'이라는 달콤한 덫에 갇혀 버린 '소통'

 정말 오랜만에 맥도널드에 왔다. 여행을 다니며 각국의 독특한 향신료의 맛이 어울려진 새로운 맛의 음식을 먹다 보면 간절히 입에 익숙한 맛들이  그리워질 때가 생긴다. 그럴 때 한식을 먹으면 제일 좋겠지만, 전 세계에 한식을 파는 식당은 극히 제한적이고, 가격 또한 배낭여행객에게는 쉽게 먹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기에 쉽게 선택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 세계 대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맥도널드로 발걸음은 향하게 되고 (가격 역시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그 맛은 각 나라마다 미묘하게 다르긴 했지만 익숙한 맛으로 받아들이기엔 충분하였다. 그렇게 한국에서 35년간 먹었던  햄버거보다 여행 중 더 많은 햄버거를 먹고 한국에 돌아오니 넘쳐나는 한식에 햄버거는 음식으로써 개념의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여행을 끝나고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홀로 점심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떨어지니 나도 모르게 맥도널드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머뭇 거리긴 했지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노란 간판 햄버거 집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여행을 하는 2년 1개월간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모르고 고민할 때마다 손쉽게 선택했던 맥도널드에 길들여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맥도널드에 혼자 앉아 점심을 먹자니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반 이상이 혼자 온 사람들이다. 확실히 패스트푸드점은 혼자 밥 먹기에 편한 공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혼자 앉아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을 하나씩 보다 보니 다들 공통점이 하나가 있다. 그 공통점은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왜 혼자 먹는 사람들은 작은 핸드폰 화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의 풍경과 하늘을 감상하기에 적합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 조차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혼자라는 어색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핸드폰 화면에 자식의 모든 신경을 쏟아 넣어 혼자 밥을 먹는다는 외로움을 잠시라도 마취시키기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요즘 임신한 아내는 한참 프랑스 육아법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저녁에 자기 전 침대에 누워 프랑스 육아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생각을 묻고 대답하며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부모가 될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 아내에게 인지하지 못했던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전달받았다. 어릴 적 아이에게 단어를 가르치는 우리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아이에게 문장과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얼마 전 보았던 프랑스에 대한 다큐가  생각났다.


 다큐의 내용은 ‘바칼로레아’에 대한 것이었다논술형 대입자격시험으로 주입형 교육의 우리나라의 수능과는 달리 철학을 바탕으로 모든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특히 철학 시험 논제는 프랑스 지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인식이 되고 있고, 그 시험 논제는 사회에서 각종 토론회가 열릴 정도로 관심이 크다고 한다. 그 다큐를 보며 어쩌면 진정한 교육은 한국의 교육이 아니라 프랑스의 교육에 가깝게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왜 우리의 교육은 저렇게 되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그 의문의 대한 가까운 답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 일련의 사건으로 어떤 모임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분명 논란의 논지는 있었지만 그것이 심각하게 될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서로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한 번 더 생각하고 예의를 지켜 이야기를 했다면 그 논란은 그 모임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논지에서 벗어나 감정싸움으로 번졌고,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적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은 편을 갈라 한쪽의 선택을 강요하였고, 선택을 유보한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꼽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은 침묵을 선택했고, 결국은 소통의 부제로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중간에 몇몇 사람들이 중재에 노력을 보였으나, 논리적 사고와 비논리적 사고의 대립은 논리적 사고의 사람들에게 회의와 포기를 안겨주고 끝나는 씁쓸함만을 남겼다. 이 상황을 처음부터 바라보며 한국사회의 정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아, 놀라움과 함께 이 작은 모임도 상식적 흐름을 가져가지 못하고 파경의 형국으로 내달리는 것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것이 침묵뿐이라는 것에 또 한번  좌절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일들과 사건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소통'일지 모른다. 사회 속 깊이 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 간의 무한 경쟁과 서로 간의 비교는 진실된 대화를 차단하게 되었고,  하루하루 전장과 같은 생활을 하며 지친 사람들에게는 심오한 철학적  물음보다는 단순히 웃고 생각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가족 간에 대화를 하지 않으며, 카페에서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 조차 각자의 스마트 폰 만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스마트 폰에 의지해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함임을 알지만, 공허함일 지라도 '잠시, 순간은 채워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스마트폰의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그 안에 스스로 갇힘을 선택한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로움은 삶에 그림자처럼 동반하게 되고, 그 외로움의 해소를 위해 스마트 폰에 의지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스마트폰 속의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라기보다는 소통이라는 포장지 속에 일방 통행적 콘테츠이기에 외로움은 채우려 할수록 더욱 증폭되는 효과를 보인다. 또한, 몇몇의 사람들은 스마트 폰 속의 다양한 정보가 존재하지만, 불편한  정보 보다는 편리한 정보 만을 취득하며 편향적 사고를 만들어, 그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해소할 대상을 찾아, 논리를 바탕으로 한 비평보다는 논리 따윈 배제한 비난으로 가득한 댓글을 채워가며 일그러진 소통의 방식을 통해 대화의 갈증을 풀고 있다.


 모두가 소통에  목말라하고 대화를 원하지만, 다른 의견의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한다. 대화를 통한  소통보다는 대화라는 명목 아래 각자의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쏟아 낸다. 대화는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구도 진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일방적인 대화와 적당한 대화에 익숙해져, 대화를 통해 소통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라는 것을, 대화는 머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다는 것을, 이 기본적이고 간단한 사실을 망각하고 소통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마트 폰 보다는 책을, 가볍고 편한 이야기보다는 보기 불편하고 골치 아픈 현실을, 타인에 대한 경계와  비교보다는 포용과 이해를,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고자 노력을 한 걸음씩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진정한 대화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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