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K Jan 07. 2016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답게 나이를 먹는 법을 배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안은 지인들의 만남의 순례를 가졌다. 끊임없이 이어진 지인들의 연락은 아마도 ‘세계일주’라는 것을 다녀온 사람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반이었을 것이고, 오랜 시간 타지에 나가 있다 돌아와 반가운 마음이  반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순례 아닌 순례를 돌며 지인들을 바쁘게 만나고 다녔다. 만나서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직막에는 슬며시 숨겨 놓았던 진짜 질문을 꺼내 놓는다. 

“그래서, 앞으로 뭐 할 거야?”, 혹은 “무슨 계획 있어?”


 아주 당연한 질문이다. 나라도 궁금할 테니깐. 이 질문은 떠나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것이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스스로 가장 궁금한 질문이다.

질문을 받고 나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글쎄? 뭐할까?”라고 되묻게 된다.


 사실적으로 귀국 후 초창기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한 방향성이 확립되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구구절절 나의 생각을 까뒤집어 지인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기가 귀찮기도 하였고, 그들에게 무엇가 모를 평가를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년이 넘는 긴 시간을 투자하여 다녀온 여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어 왔나, 혹은 여행 중 발견한 사업 아이템은 없나, 향후 나에게 필요할 사람인가? 아니면 나에게 귀찮을 존재인가에 대한 간을 본다는 느낌을 지우기 쉽지는 않았다. 

 유별나게 다들 사회에 적응해서 잘 살아가는데 너 혼자 뭐라도 되는 것처럼 유난 떨고 떠났으니 이제 두고 보자는 식의 반응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느낌을 지우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스스로 자격지심이 낳은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연락으로 간(?)을 보고  찔러봤을 때 별 색다른게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안부 메시지 한번 없이 연락이  두절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쁜 드립 커피를 마신 것처럼 입안에 오랫동안 남는 기분 나쁜 씁쓸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 1~2년을 하고 난 사회 초년생일 때 일이다. 10여명이 넘는 대학 동기들, 소위 몰려다니던 무리들은 운 좋게 좋은 직장에 다들 취업을 하였고  그중 한 친구가 취업을 못했다. 처음에는 그 친구를 챙기려 몇몇의 노력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그 친구는 잊혀져 갔고, 그 친구의 소식 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몇 번의 연락을 하였으나 연락을  불편해하고 받지 않던 그 친구의 태도에 배려라는 허울 뒤에 숨어 연락을 끊어 버린 게 아녔을까? 


 사람들은 비슷한 처지의 유사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의 교류를 선호한다. ‘유유상종’이란 말로 대변되는 이 현상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강력하게 발현되는 것 같다. 특히,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었다 판단되고, 어느 정도 자리를 만들었다 생각돼 어질 때, 기득권 영역의 테두리에 발을 살짝 넣었다 판단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놀랍게도 이분법적 사고를 고수한다. 

표면적으로는 ‘틀린게 아니라 다른것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다만, 나랑은 안 맞아.’라는 말로 분명한 선을 긋고 대화의 문을 닫아버린다. 

 입 아프게 타인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굳이 타인의 사고를 수고를 들여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수고를 들인다고 한들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한다.’라는 지성인의 표현으로 에둘러 선을 긋는 것이다. 나 역시 어찌 보면 그러하기에 나의 계획과 생각을 지인들에게 펼쳐 보이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에둘러 모호하게 답을 하는 것일지 모른다.


 여행을 다녀와 6개월이라는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우습게도 사춘기와 취준생 때 보다 강도 높은  질풍노도와 과도기의 시기가 지나갔다. 짧지만 강력한 내면의 휘몰아침이 지나가고 난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내적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물론 가끔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불면증이  찾아오곤 하지만, 완벽히 다른 성실의 고민이다.) 

 가끔 지인들이나 아내의 지인들이 나의 근황을 묻곤 한다. 그럴 때면 웃으며 

“가정주부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짧고 명확한 답변을 건넨다. 참,  아이러니한 것이  이야기하는 나는 편안하고 밝은 표정인데, 질문을 던진 상대방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잠시 내비치다 이내 웃으며 “부럽다”를 연발하며 상황을  마무리한다. 그 뒤에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건 그들이 몫이지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무게는 아니니깐.


 지금의 난 타인이 시선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타인의  소리보다 스스로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현재의 삶에 집중을 하고 즐기는 방법을 배우며 나답게 나이를 먹어 가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이전 05화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