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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 Mar 28. 2016

세월을 담는 그릇, 얼굴

오랜만에 마주한 옛 친구의 얼굴에서 어둠을 보았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SNS를 지양하게 되었다. 가장 큰 것은 게으른 성격 탓이겠지만, 개인 성향과 SNS가 가진 성질이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브런치’ 역시 변형된 SNS의 한 종류이겠지만 개인 사생활의 공유와 소통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다 보니 개인적으로 수용이 되는 수준이었다. 인스타그램 역시 일생활이 아닌 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저장 및 정리하는 개념으로 ‘walking.on.the.earth’라는 개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사진 따로 글 따로, 개인적인 취미 생활을 하는 자기만족의 공간 정도, 딱 그 정도 선이다.


 여행을 다닐 무렵에는 ‘페이스북’이 유일한 SNS 활동이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는 시간을 소모할 일이 필요했는데, ‘페이스북’이 딱 적격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며 만난 친구들과 지속적인 네트워킹을 하기에도 ‘페이스북’만큼 적합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페이스북’을 하면 할수록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리되지 않고 무수히 넘쳐나는 정보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함들이 자연스럽게 ‘페이스북’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여행 말미쯤부터 ‘페이스북’의 책장을 열어보지 않게 되었고 그위에는 소복하게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 한 달에 한두 번 쌓여있는 알림 숫자를 털어내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연락을 확인하기 위해 책장을 열어보곤 했다.


 얼마 전 외국 친구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떠있는 추천 친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대학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이름이 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정확히 말하면 사이가 틀어져 버린 엑스 베스트 프랜드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 친구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닮긴 했는데 내가 알고 있던 그 친구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사진을 바라보고서야 그 친구 임을 인지하였다.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를 갓 입학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을 때 강의동 앞 벤치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던 내가 신기했는지, 아니면 그 친구도 정말 심심했던 것인지 만화책을 빌려 달라며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친구가 된 우리는 6년간 끊임없이 스캔들에 시달렸지만 그 친구가 졸업하는 해에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많은 일상을 공유하는 절친한 이성 사람 친구였었다. 만으로 6년간 20대의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친구였지만, 의미 없는 작은 논쟁으로 다툼은 시작되었고 서로가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 세우면 6년간의 우정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철부지였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며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시간이 지나 묵은 감정보다는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더 남아있었고, 그 다툼이 있을 당시 다른 친구를 통해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스스로 직접 사과하기 전까지는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매몰차게 행동했던 과거의 미안함이 남아 있어 먼저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었다. 지난 과거이기에, 그 순간의 오해와 다툼이었고, 그 시절 우린 어렸었기에 시간이 지나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거칠고 제 멋대로였던 성격도 어느 정도 다듬어진 지금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가움이 앞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방통행이었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 친구가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과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친구는 왜 다툼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친구의 기억은 이러하였다. 그 다툼이 일어나기 전 친구 A가 그 친구에게 고백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 자리에서 거절을 했고 친구 A를 응원했던 나는 친구 A를 위해 이유 없이 그 친구와의 관계를 멀리 했다는 것이다. 남녀관계에 친구 사이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베스트 프랜드라고 생각했던 나의 배신은 그 친구에게 큰 상처로 남았고 지금까지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답답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게 일그러진 기억으로 그 친구의 기억 속에 찌꺼기로 남아있고 싶지 않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가 소유한 기억이 무언가 불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다는 것을 인지하여도, 내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자신은 큰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다시 상기시키기도 싫고, 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이미 그 친구는 나와의 친구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였고, 그 단절된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의지도 의미도 없었기 때문에,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대화를 멈출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잘 살기를 바라며 그 친구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다 ‘페이스북’에서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친구의 사진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놀랐던 것이 얼굴의 변화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여도 그 세월을 감안하여도, 알고 있던 그 친구의 얼굴과 사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대학 시절 그 친구는 항상 밝고 해맑은 모습에 주변 남자들에게 인기가 참 많았다. 공대라는 특성도 있긴 했지만, 일 년에 2~3차례 남자들의 데쉬가 이어졌었고, 가끔은 도서관에서 쪽지를 받았다며 자랑하던 예쁘장한 외모의 친구였었다. 내 취향의 외모는 아니었지만, 밝은 성격이 드러나는 인상은 같이 있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업 시켜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사진의 그녀의 인상은 무언가 모를 주눅과 찌든 일상이 묻어 전체적으로 어둠이 깔려 있는 모습이었다. 이 친구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에 그 친구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어보게 되었다. 페이스북 친구가 아녔기에 알 수 있는 정보는 살고 있는 곳과 딱 두장의 사진뿐이었다. 살고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뉴질랜드로 되어 있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해외여행 한번 안 다녀왔고 여행에는 별 관심이 없던 친구가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장의 사진은 자신의 사진 한 장과 아들의 사진 한 장이 다였다. 그리고 그 밑에 달려 있는 댓글은 종교가 없던 그 친구가 뉴질랜드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 정도였다. 아주 단편적인 정보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사진 한 장에 담겨있는 그 친구의 얼굴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차려입고 한껏 꾸미고 찍은 사진이었지만, 얼굴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들켜버린 슬픔이 묻어 나는 인상의 사진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기우 일수도 있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하여도 확인하기보다는 기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고 싶지만, 그 친구의 인상이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인상 : 사람 얼굴의 생김새. 또는 그 얼굴의 근육이나 눈살 따위.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


 그 친구의 인상은 뜻 그대로 그 친구의 얼굴의 생김새 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 느낌이 무언가 모르게 안쓰럽고 무거워 그 사진을 본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냥 기우이기를 혹은 그 사진이, 그 사진을 찍은 그날이 그 친구에게 유독 힘들고 괴로웠던 날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각자 다른 생김으로 태어 난다.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얼굴로도 타인보다 덜매력적인 얼굴로도 각자가 주어진 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태어 난다. 그 주어진 얼굴은 바꿀 수가 없다. ( 물론 의느님의 힘을 빌리면 새로운 얼굴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얼굴은 변하지 않지만 그 얼굴이 가진 인상은 변하기 나름이다. 신기하게도 삼십 대를 들어서면서 서서히 얼굴에 그 사람의 인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지천명에 도달하는 시점에선 확연히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얼굴에서 찾아볼 수가 있게 된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 그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생김새와는 별개로 그 사람의 인상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숨길 수 없는 지표가 된다.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오롯이 담기는 것이기에 온화한 인상을 가지고 멋스럽게 늙어가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마음가짐을 항상 다잡아야 할 것이다. 일생활의 하나하나가 겹겹이 쌓이고 쌓여서 당신의 인상을, 얼굴을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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