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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헌 Oct 07. 2019

블랙미러로 철학하기
- 과학적 진보와 인간성 -

다가온 미래에 관하여 


주제 : 과학적 진보와 인간성  / 작품 : 블랙미러로 철학하기 <이원진>


입문학 금요일에서 나눈 대화를 소재로 쓴 글입니다. 


#북살롱 #몽덴 의 후기입니다.



블랙미러로 바라본 미래일기


블랙미러를 안 보신 분은 계실 수 있어도 못 들어 보신 분은 없을 겁니다. 블랙미러는 과학기술이 불러올 미래 사회를 조금은 우울한 방식으로 그려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드라마 시리즈입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곧 살아갈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SF라기보다는 현실적인 드라마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 작품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순히 과학기술이 불러올 문제점만 던져주기 때문은 아닙니다. 철학의 영역에서 항상 고민해왔던 문제들을 과학기술들이 빚어내는데 그것을 심도 있게 다루기 때문이죠.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철학적 딜레마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이 작품을 기반으로 쓴 책인 '블랙미러로 철학하기'라는 책은 놓칠 수 있었던 철학적, 윤리적 딜레마를 짚어보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지를 던져줍니다. Nosedive의 평점 사회나 USS 칼리스터의 디지털 개체의 인권문제 그리고 샌 주니페로의 디지털 불멸까지. 이번 글에서는 각각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과학적 진보가 가져오는 인간 사회의 변화와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로 블랙미러를 보면서 느껴지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왜 디스토피아인가?


블랙미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큰 이유 중 하나는 불편함입니다. 왠지 찜찜하고 우울해지기까지 하니까요. 비극적 결말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요동을 차치하더라도 작품을 봤을 때의 기분 나쁨이 있습니다. '불쾌함'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작품이 디스토피아적으로 세계를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왜 우리는 기술적 문제들에 대해 불쾌함을 느꼈는지를 고민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쾌함은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패스트푸드 매장에 가면 직원에게 직접 주문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키오스크를 통해 비대면으로 주문하는 방식이 늘고 있죠. 그리고 종종 그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어르신 분들도 보게 됩니다. 새로운 기술 앞에 어쩔 줄 몰라하는 한 인간을 발견하곤 하죠. 또 사이버 세계의 발달로 사람들 간의 유대가 약해지고 서로 만나도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의 기사도 생각이 납니다. 십몇 년 전 그 기사를 보면서 점점 더 인간 사회가 각박해지게 되는 것일까에 대한 우려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에 적응한 까닭일까요? 어쩌면 과거의 사람이 미래에 가면 항상 겪게 될 문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상호작용과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일지도요. 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새로운 기술이나 방식으로 인해 생긴다면 이전의 것이 더 좋다고 혹은 더 옳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Nosedive가 지적하는 평점 사회의 문제도 이미 우리 사회에 들어서 있습니다. 다만, 기술이 그것을 조금 더 용이하게 해 줄 뿐이죠. 이미 평가받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앞으로 평가받게 될 것은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 인간의 마음은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이미 그렇게 행해지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를 들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아직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블랙미러는 그런 인간의 오묘함을 잘 건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키오스크 앞에 선 노인의 두려움처럼 기술 앞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인간의 두려움을 잘 드러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볼 때 특히, 미래의 문제들을 마주할 때 그러한 불쾌함이나 불편함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간이 되려고 하는가?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 불편함을 딛고서라도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과학 기술이라는 힘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혹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죠.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분명히 인간보다 나은 존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외계인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고요. 인간은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방향을 알고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디지털 불멸을 이야기하는 샌 주니페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는 인간이 드디어 그 세계에서 불멸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예전에는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내부적인 요인들에 기인했던 것 같습니다. 종교나 그와 비슷한 무엇으로 성숙이나 성찰이라는 단어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죠. 해탈과 열반 혹은 구원이라는 단어는 다른 존재가 된 인간에게 부여해 볼 수 있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DNA의 변형, 기계화, 디지털화를 통해 다양한 인간을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인간과 다른 존재를 창조해내는 것을 넘어 다른 인간이 되려고 하죠. 


글쎄요. 지금은 그 누구도 과학 기술이란 열차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그 속도만 높이려고 할 뿐이네요. 그런데 잠깐, 이 열차에 브레이크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멈출 수 없는 기차에 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기차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뒤로 하고서 멈춰 세울 수 있는지 한 번 고민해봐야 합니다. 인간은 과학적 진보를 스스로 중단할 수 있을까요? 이 열차의 종착지가 낭떠러지인 것을 안다 해도 그것을 멈출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학 기술을 이야기할 때 그 기술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대부분 실보다는 득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진보를 시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미 세뇌당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만약 실이 더 크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우리는 이 기차를 멈춰 세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실이 더 큰 상황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몇 없이 보이네요. 과학적 진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평점 사회에서 적응해서 높은 평점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디지털 불멸의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지 상상해봐야겠지요. 어쩌면 우리보다 우월한 AI에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이 불편하고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괜찮습니다. 다 익숙해지니까요.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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