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나를 한 꺼풀 벗기면 (혹은 여러 겹 벗기면) 드러나는 원형에 가까운 내가 있는데, 그게 생각보다 더 유치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요즘입니다. 시기, 질투, 충동, 욕심, 조급함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런 나를 가리기 위해 애써 포장도 해보지만, 결국 그 원형에서 몇 발자국 떼지 못한 상태라는 것도 새삼 느끼고 있어요. 원형을 마주한 뒤에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주하고 한 발짝 내딛고, 다시 뒤돌아보고, 돌아간 뒤에 또 한 발짝, 속도를 내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나를 바라보며 조급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순수함을 붙잡고 정지하고 싶은 시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순수함과 규범의 충돌에서 벌어지는 다층적인 혼란들이 홀든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상태. 그 싸움이 여러 가지 형태로 분출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죠. 내가 존중받지 못하고 훼손되는 느낌이 거부감이나 반항으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나는 진짜인데 가짜를 덮어쓰라고 강요받는 느낌이었을까요? 짐작해 보곤 합니다.
저는 어쩌면 자라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어느 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여전히 순수함에 머물며 누군가 나를 보살펴주길 바라고 있죠. 예를 들면, 중언부언 맥락 없이 이야기를 한다거나,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벗어나버린다거나,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문에 머리를 찧는다거나 (최근에 계단 옆 시멘트벽에 머리를 쾅- 박아서 이마가 한동안 퍼랬다가 노랬다가 초록색이 되었죠), 내 물건을 자꾸 잃어버린다거나, 놓고 다닌다거나, 길을 잘 찾지 못하는 행동들 말이에요. 이런 행동들이 사실은 내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싶기 때문에 쓰고 있는 전략은 아닐까 싶어요.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바꿀 수 있는 행동인데 나는 굳이 바꾸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죠.
다시 책으로 돌아와, 홀든이 꿈에 대해 동생 피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서 원래 노래 제목은 'meet'였는데 그것을 'catch'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죠. 그리고 피비가
“오빠 그 노래는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 이 아니라 만난다면이야.”
라고 고쳐주게 됩니다. 아이들은 생각 없이 마구 달리기 마련이니까 붙잡는 사람이 되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고 싶다는 홀든.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아이들은 자라는 존재잖아요. 언제까지고 생각 없이 마구 달릴 수만은 없어요. 파수꾼이 존재하지 않아도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하죠. 아이들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국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책의 마지막 부분에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장면이 나와요. 황금링을 붙잡으면 공짜로 한 번 더 탈 수 있게 되죠. 링을 붙잡다가 피비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홀든은 아무 말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해요. 홀든이 붙잡아주면 피비는 계속해서 회전목마(순수함)를 탈 수 있는데도 그저 지켜보기만 하죠.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하고 순수성을 지켜주고자 노력하던 태도에서 그저 지켜보는 태도로 변화합니다. '그냥 여기서 널 보고 있을게.'라고 응원하면서요.
자신의 순수함을 붙잡은 채, 어른이 되길 거부했던 홀든이 어른의 세계로 한 발짝 내딛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생각한 좋은 어른을 조금 수정해야겠더라구요.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니라 호밀밭의 경비원쯤이 적당할까요.
이곳에는 위험한 절벽이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 그럼에도 떨어지고 다친다면 그때 달려가서 치료하고 위로해 주며 응원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데도 미리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청할 때, 날 필요로 할 때, 돌아보면 옆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고민한 일이 무색하게 또 잊어버리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게 될지도 몰라요. 매우 가능성이 높죠. 다만 다음번에 마주할 때는 고민의 시간이 줄어들길 바라요. 자라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고 쉽게 도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사실은 단단하게 자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