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인간은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신체로 태어납니다. 막 태어난 아기의 뇌는 완성이 되지 않아서 작고 말랑합니다. 심지어 정수리 한가운데가 열려있죠. 미성숙한 뇌가 커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습니다. 뇌가 완성되기 전까지 인간은 스스로 먹을 수도 일어설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죠. 때문에 나를 둘러싼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보호하는 이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그로 인해 완성되지 않은 뇌를 가졌지만 타인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를 보호받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생각하는 본능적 행동, 어린 나이부터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은 타인이 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도 적합합니다.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죠.
생각할 부분은 이 지점입니다. 인간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낸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생존 본능을 잠시 뒤로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대단한 종 특성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역시 부족한 신체를 보완하기 위해 협력이라는 생존 본능을 발휘했을 뿐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타인이 협력해 왔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생각하고 수많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물려받으며 성장해 온 우리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고 ‘개인의 능력’이나 지극히 좁은 의미의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협력으로 만들어 낸 사회가 다른 집단과 협력을 못하게 한다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집단 내 타인 (158쪽)
우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도 우리 집단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같은 스포츠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 같은 동호회 사람이면 우리 집단이 되며, 십자가 목걸이 하나로 우리 편으로 여기기도 한다.
발령을 기다리며 혼자 기차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부산에 도착했는데 비가 어마어마하게 내렸습니다. 타고 있던 시내버스 바닥으로 빗물이 들어차 찰랑거렸고 버스는 운행을 중단했습니다. 앞에 앉아 계시던 시민분께 물었습니다.
”제가 여행을 와서 이곳이 처음인데요. 여기서 남포동이 많이 먼가요? “
“여행 오셨어요? 저도 여행을 정말 좋아해요. 저도 마침 가는 길인데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께서는 여행을 매우 좋아해서 주말마다 가이드를 자처하는 분이셨고, 저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집단 내 타인을 만나게 된 것이죠. 덕분에 저는 지름길로 도착지에 빠르게 갈 수 있었고 맛있는 국밥도 얻어먹었으며 경주가 여행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니, 꼭 가보라는 팁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타인에 대하여 사회적 유대를 맺기 위해서는 같은 집단, 즉 우리 편인지가 중요합니다. 집단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나타납니다. 종교, 지역, 국가, 좋아하는 가수 등등 쉽게 호의를 베풀고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집단은 매우 다양하죠. 다양한 집단이 만들어지는 만큼 어딘가에 협력하기도 쉽고 반면에 배척하기도 쉽습니다. 각각의 사회 규범이 충돌하게 됩니다. 충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은 불가피한 걸까요? 집단 내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유대감을 바탕으로 다른 집단을 존중하고 품을 수는 없을까요?
경쟁은 어쩌다 인간의 생존 방법이 되었을까?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은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내 것을 남들보다 많이 가지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일단 생존에 매우 유리하고 더불어 내가 속한 집단에 기여하거나 나눌 수 있습니다. 기여도가 클수록 집단에서 영향력은 매우 커질 것이며 그것은 곧 권력이 됩니다.
모든 사람의 뇌에는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혹은 ‘그들은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다.’라는 인식입니다. 이를 위해 빠르게 피해자의 위치를 선점하기도 하죠. 더불어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을 넘어 집단이 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합니다.
[어떤 결정에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기여한다면, 그 잔인함이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잔인해질 수 있다 (앨버트 벤듀라)]
오답임을 알면서도 다수의 견해에 쉽게 동조하고 권위에 복종합니다. 내가 져야 할 책임이 다수 속에 가려지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우 단순합니다. 각자와 각자를 그저 한 사람의 시민으로 존중하면 됩니다. 개인이 모두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빛을 반짝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편을 나누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적으로 규정한 상대편을 비인간화하여 폄하하고 배제하기도 쉽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이기는 것 같으니까요.
이기고 지는 것에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문장을 들여다봅니다.
‘다정한 내가 다정하지 않은 다른 이들보다 인정받고 살아남는 건 너무나 당연해.‘
라고 생각하며 승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싶다면서 마음 한편에는 항상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언제나 마뜩지 않게 져주는 사람밖에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지는 사람도 아니고 당당히 이기는 사람도 아닌 채로 말이죠.
(300쪽)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다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혹은 인정받기 위해) 다정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