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는 해마다 번갈아가며 체육대회와 동요 축제(라고는 하지만 사실 학예회)를 크게 운영한다. 올해는 체육대회를 운영하는 해이다. 우리 반 별명도 짓고 그에 맞는 반티를 만들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아이디어를 구했다.
재밌는 상상을 잘 하는 준희가 말했다.
"육 학년 이반이고 우리 반 친구들이 스물다섯 명이니까. 육이오반 어때요?"
"오오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한과 북한은 비록 단절되어 있지만 우린 하나니까요!"
"오오오오오!"
압도적인 호응과 지지로 우리 반은 육이오반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체육대회 날짜가 너무 빠르게 다가오는 바람에(학기 초는 정말 정신이 없다) 로고 공모전을 하지 못하고 몇 개의 시안을 보여준 뒤 투표를 했다.
"얘들아, 체육대회 전에 반티를 주문하려면 시간이 없어서 선생님이 일단 이렇게 만들어 봤어. 선에 의미가 있는데 반듯한 선은 3.8선이고 구불구불한 건 현재의 휴전선을 반영한 거야."
"선생님, 밑에 '우리는 하나다' 글씨 빼면 안 돼요?"
"왜? 우리 반 로고에서 그 의미가 중요한 것 같아서 넣었는데."
"심플 이즈 더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다'를 꼭 넣고 싶었건만, 점점 흑화(?)되어가는 육 학년들 답게 '창피해서 안된다.' '깔끔한 게 최고다.'며 이것저것 다 빼고 반티가 완성되었다.
아이들 티셔츠 사이즈를 조사하고 부랴부랴 주문을 넣었더니 다행히 체육대회 전에 반티가 도착했다.
어디서든 눈에 확 들어오는 우리 반 ^0^
심플 이즈 더 베스트가 맞긴 맞나 보다.
우리 반 회장님(귀여운데 귀엽지 않은 척하는 게 엄청 귀엽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깔끔하고 정성스러운 응원 도구를 만들어왔다. 평소 말이 없고 시큰둥한 편이어서 나를 어려워하나 싶었는데 '우리 뒤에 쌤 있다.'라니! 나를 믿고 있다는 의미 같아서 너무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한 체육대회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여 학급 밴드에 게시했다. '정신없던 오늘이 드디어 끝나간다.'라고 생각한 순간 문자 알림이 울렸다. 호진이 어머님이었다.
[오늘 더운데 고생하셨고요. 괜찮으면 통화가능하실까요?]
호진이가 집에 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방과 후에 친구와 다투었나? 체육대회 하다가 다쳤었나?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문제들이 떠올랐지만,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선생님께서 올리신 마지막 영상 있잖아요."로 시작한 호진이 어머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영상에는 아이들이 원형으로 어깨동무를 하며 뱅글뱅글 도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여학생들이 하나의 원을 만들어 환호하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남학생들이 원을 만들어응원가를 불렀다. 원에 끼어들어서 중간에 합류하는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고, 끼어들지 않고 지켜만 보는 호진이의 모습이 보였다. 호진이 어머님은 호진이가 지켜만 보고 끼어들지 못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했다. 선생님이라면 영상을 찍을게 아니라, 호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함께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셨다.
"어머님, 호진이가 응원에 끼고 싶지 않아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호진이에게 그때 어떤 마음인지 물어보셨을까요?"
어머님은 호진이와 이 일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영상을 내려달라고 하셨다.
영상에는 함박 웃으며 노래 부르는 아이들의 얼굴이 한가득이었다. 케이리그 응원가를 변형시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서로 지지 않으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주로 외향적인 친구들이었다. 내향적인 친구들은 멀리서 지켜보거나 자기들끼리 다른 방식으로 놀고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던 호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끼어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지만 친구들이 자기를 챙겨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사실, 호진이는 자주 아프다고 말하는 친구다. 체육만 하고 오면 "선생님 다리가 아파요."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선생님 체육하고 와서 다리가 아픈데 엘리베이터 타고 싶어요."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호진이는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여러 번 걸렸다. 학교에서 엘리베이터는 장애인과 무거운 짐을 든 사람, 긴급환자를 위한 시설이다.) 한 번은 체육 수업을 하고 온 호진이가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저 다리가 아파요."
"그래서 호진이가 바라는 게 뭐야?"
"네?"
"체육 하고 다리가 아픈데, 그래서 호진이가 원하는 게 뭐냐구."
"..."
"엘리베이터 타고 보건실에 가고 싶어?"
"네."
"그럼 다음번에는 '체육 하다 다리를 다쳐서 보건실에 다녀올게요'라고 말해 보자. 네 마음은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남이 알아차리기가 어려워."
아이들은 아이들이어서 자신의 상황만 말하면 마음까지 전달이 되는 줄 안다. (사실 나도 내 상황을 본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까지 알아차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선생이니까 그 다음을 가르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