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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산다는 건, 집을 사는 걸까 사람이 사는 걸까

전라북도 익산시 모현동

by 좋아해

“아! 또 밟았잖아. 잘 좀 보고 다녀.”

“오빠가 거실 한가운데에 누워 있으니까 그렇지.”

“밟으려면 차라리 넓게 밟던가. 꼭 살 끝에 조금을 밟아가지고 더 아프게 만들어.”

“키도 큰 사람이 기다랗게 누워 있으면 내가 짧은 다리로 넘어가는 게 쉬워 안 쉬워? 안 밟으려고 다리를 이마안-큼 벌려도 오빠가 그 이상으로 누워 있다고! 자꾸 그러면 배 한가운데 확 밟고 지나가버린다?”

“내 키가 커서 그러는 걸까? 네가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우리 집이 작아서? 한 번 봐봐. 여기 누우면 내 머리 위로 침대가 닿는다? 발 끝에는 책상이 닿고 왼 손을 뻗으면 거실 문을 만질 수 있어. 오른손을 뻗으면....”

남편은 거실 한가운데에 누워 오른손을 베란다 쪽으로 뻗었다. 한 뼘 정도 남는 거리가 못내 아쉬운 듯 꼼지락 거리다가 말했다.

“베란다까지는 안 닿네? 아무튼 여기서 모든 걸 다 만질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은 건가? 최적의 동선! 누구가 자꾸 내 몸만 안 밟으면 딱이겠다.”

“오빠...... 오빠가 여기 누워있지만 않으면 돼.”

“나는 와식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남편은 거실 바닥에 누워 있는 걸 좋아했다. 문제는 우리의 거실은 여러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는 것. 아기 욕조를 가져와 씻기면 목욕탕이 되었고 접이식 식탁을 가져와 펼치면 부엌이 되었다. 아이들 장난감이 모여들면 키즈카페가 되었고 빨래 건조대가 놓이면 세탁실이 되었다. 그리고 남편의 와식 생활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우리 집에서 첫째 아이가 말하는 걸 기뻐했고 (첫째는 세 돌이 지나서야 말이 트였다) 둘째 아이를 뱃속에 품고 낳았으며 둘째가 걸어 다닐 무렵까지 투닥투닥 부대끼며 살았다. 맨 꼭대기층의 어떤 여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워서 매일 맥주를 사서 마셨고, 또 어떤 여름은 큰 마음을 먹고 투인원(2 in 1) 에어컨을 장만했다. 하나의 실외기로 두 개의 에어컨을 쓸 수 있다는 상품 설명이 무색하게 우리 집은 너무나도 작았다. 투인원은 무슨, 원바이원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옛날 아파트여서 실외기실이 따로 없었고 에어컨 배관 설치를 위해 벽에 구멍을 두 개나 뚫어야 했다. 그것도 거실에)

“이 집 구조에서는 도저히 에어컨을 두 개 놓을 수가 없어요. 배관이 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게 할 수도 없고... 그런데 거실에서 바람을 쏘면 아마 이쪽 방까지 금방 시원해질 거예요”


그렇게 투인원 에어컨의 투(two)는 상자 속에 그대로 담겨 베란다에 보관되었다. (‘안녕! 냉장고야! 너도 여기에 있구나! 나는 에어컨이라고 해!’) 에어컨 설치 기사님의 말씀대로 에어컨 하나만으로도 집은 충분히, 차고 넘치게 시원해졌고 우리의 여름은 조금 더 행복해졌다.


우리의 첫 아파트, 동 간 간격이 시원하게 넓고 나무들이 흐드러지게 아름다웠던 주공 아파트에서 열네 번의 계절을 보낸 뒤 이사를 결정했다.


어렸을 적, 집 안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었던 남편은 빚이 무서웠다. 어렸을 적, 집 벽에 치솟는 기름값을 적으며 한숨을 쉬던 부모를 본 나는 돈이 무서웠다. 최소한의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계약하기 위해 은행에 찾아갔다. 대출을 진행하던 은행원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건넸다.

“고객님, 집을 사면서 대출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왜 전세 대출을 하세요?”

“집을 사려면 대출을 더 많이 받아야 하잖아요.”

“그래도 대출을 받으실 거면 투자 생각하시고 집을 사는 게 좋아요. 전세 대출은 내 집이 아닌 걸 갚는 거잖아요.”

말문이 막힌 채 당황하는 나를 보고 직원분은 재빨리 말을 보탰다.

“아니, 선택은 고객님이 하시는 건데, 저라면, 저라면 전세가 아니라 집을 살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대출이야 조금 더 받아야겠지만 내 집이랑 전셋집은 다르거든요.”


집은 도대체 뭘까.

내 집과 전셋집은 또 뭐가 다른 걸까.


빚이 싫었던 우리는 내 집이 아닌 전셋집을 택했고 이사를 한 그날 밤 단골 가게에 치킨을 시켰다. 사장님께서는 항상 똑같은 메뉴를 시키는 우리를 알아봐 주시며 "1동 2호 반반 맞죠?"라는 말과 함께 치킨을 배달해 주시곤 하셨다.

'이번에는 전화 내용이 살짝 달라지겠네.'

사장님께 우리의 이사 소식을 전하려는 마음에 약간은 들떠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전화 연결 신호음에 이어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주공아파트 1동 2호, 반반 맞으시죠?”

“사장님, 저희 오늘 이사했어요. 34아파트 5동 6호로 배달해 주세요.”

“오! 오늘 이사하셨어요? 34아파트로요? 아이구 축하드립니다!”

사장님께서는 자기 일인마냥 기뻐하며 목소리가 높아지셨다.

“아이구. 이사 진짜 축하드립니다. 엘리베이터도 생기고 얼마나 좋아요. 아이고 고생하셨네요. 감자튀김은 축하하는 마음에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이사 축하드립니다! 전에도 좋으셨겠지만, 여기에서도 좋은 일 가득하세요.”


반가움에 한 톤 높아지던 그 목소리,

애썼다며 함께 기뻐해준 그 마음,

서로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건네던 그 단골 가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살아가는 것,

집에 산다는 건, 이런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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