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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Aug 28. 2021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그리운 할머니, 호상이 어디있니......


지인 어머니의 부고소식에 퇴근한 신랑과 조문을 갔다.

병원에 도착해 전자 영정사진을 먼저 보니 자식이 셋이다. 

자부가 한 명, 사위가 두 명인걸 보니 아들은 하나인가보다.

입구부터 저 멀리 복도까지 화환이 빼곡히 줄 서 있는걸 보니 자식들이 꽤나 잘 사나보다.

'어머님은 흐뭇하시겠다.'


"안나" 떠나신 어머니의 세례명인가 보다.

크리스챤이지만 나는 장례식에 가면 큰 절을 올린다. 

사실 나의 종교적 신념이랄 것도 없지만 '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천국으로 가는 그 분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하지 마라는 것은 아닐꺼라고 스스로 해석해 버렸다.

'모든 걱정, 근심 내려놓고 편히 가세요.'

'천국에서는 여기보다 더 행복하세요.'라고 큰 절을 두 번 올렸다. 


장례용품에 새겨진 문구로 자식들의 직업을 가늠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법조인이면 그래도 꽤 성공한 부류로 남들의 부러움을 샀을텐데 

어머니 자신의 삶도 만족스러우셨을까 궁금했다.


다행히 장례식 장 분위기가 침통하지 않다.

이런 경우는 조문객도 너무 슬퍼하면 안될 것 같다. 

폐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방의 대학병원 두 군데서 발견하지 못했다. 

서울에 와서 문진 한번에 암인걸 알게 되셨는데 이미 3기 말이었다고 한다. 

3년정도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운명하셨다고. 




몇 달 전 소천하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 연세 여든여덟세이다. 외할머니는 강한 분이셨다. 자존심도 세고, 본인의 주관도 확실했다. 

그런 할머니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힘이 빠지셨다. 

나는 친할머니 사랑을 못 받아 외할머니가 더 좋았다. 외갓집은 서울 중앙대 근처였는데, 어릴 적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집에 갔다왔다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외갓집에 가면 좋았다. 할머니 반찬은 특별할 것도 없는데 다 맛있었다. 밥 잘 안먹는 나도 외갓집만 가면 두 공기씩 먹었다. 여느 할머니처럼 살갑진 않으셨지만 나는 할머니가 좋았다.


내가 태어날 쯤 무릎을 접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할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셨다고 한다.

엄마는 나한테 자주 말씀하셨다.

"너는 할머니한테 진짜 잘 해야해."


우리 큰 아이가 돌이 지나기 전 할머니가 오신 적이 있다.

한 손바닥에 애를 올려놓고 비행기를 태우시는 할머니를 보고 엄마와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할머니 정정하시다. 다행이다." 

할머니는 까르륵 대는 아이를 보고 껄껄껄 크게 웃으셨고 그런 할머니를 보고 나와 엄마도 크게 웃었다. 지금도 할머니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야근을 하고 사무실을 막 빠져나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 '엄마'.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엄마가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할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이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가 가셨어." 한 마디 내밷고는 목 놓아 울어버리신다. 수화기 넘어 꺽꺽대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나는 아직 차에 타지도 않았는데 회사 주차장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가셨어? 진짜 할머니 가셨어?"

"응, 가셨어. 이제 할머니 못 봐. 어떡하지?"

엄마와 나는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계속 울기만 했다. 

어떻게 차를 운전해서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정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20년을 혼자 지내셨다. 

가진 재산 없어 자식들에게 살가운 챙김도 제대로 받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막내 아들이 십여년 전 타국으로 나간 후부터 줄곧 혼자 사셨다. 

성격이 강하기도 하셨고, 누구하나 같이 살겠다는 자식도 없었다.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늦둥이 막내 아들이 할머니의 짝사랑이었고 엄마는 오남매 맞이로 본인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임종을 본 자식이 한 명도 없다.

매일 할머니와 통화하던 엄마가 하루종일 전화 통화가 되지 않자 저녁먹고 직접 가보셨다 발견하신 것이다. 가스렌지 위 찜통 속에는 호박잎이 끓고 있었다. 밥상을 차려놓고 할머니는 날씨가 더워서인지, 큰 딸 고생 안시킬려고 했는지 샤워를 마치고 속옷까지 싹 갈아입고 옆으로 누워 계셨다고 한다. 평소에도 깔끔한 할머니가 가시는 순간까지도 깔끔을 떠셨다고 엄마는 또 울었다. 기운없단 소리를 자주 하셨다고 하는데, 기운이 없으셨는지 주무시듯 그렇게 할머니는 다시는 깨지 않는 잠을 주무셨다.


'자주 가서 뵐껄.'

'용돈 좀 많이 드릴껄.'

'전화라도 자주 할 껄.'

후회가 밀려온다.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이 왜 지금 생각나는 건지...


할머니가 할아버지 곁으로 가신지 2년이 되었다.

엄마는 아직도 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눈물을 보인다.

"나 무슨 젖먹이 아이가 엄마 젖 찾는 것 같아."

엄마는 늘 아들인 동생들 다음이었다. 그래서 일까? 

할머니는 "내가 니 은혜를 어떻게 갚니...내가 너 고생시켜서 어쩌니..." 하며 늘 미안해 하셨다.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를 모시러 올라가는 산 길이 참 더웠다. 앞서 올라가던 숙모가 딸들에게 한 마디 한다. "봄이나 가을에 돌아가셨으면 얼마나 좋아. 한 여름에..." 뒤따라오던 나를 보고는 뒷말을 흐린다. 못들은 척 했다. 문상 온 친구들한테도 "호상이야. 괜찮아."하던 숙모가 너무 야속했다. 


'호상이라구? 호상이 어디있어? 이렇게 그리워하는 남은 이들이 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다른 이들은 모두 웃었다.  이 세상 떠날 때 나만 웃고 다른 이들은 모두 우는 인생을 살자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떠난 후 남은 이들이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진 속 나를 추억하느라 울고 웃고 신나게 떠드는 삶을 살아보자고 나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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