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외국어가 좋았을 뿐이데, 의도치 않은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개 대학 진로는 수능 점수에 맞춰 정해진다.
생각보다 수능을 잘 못 보았고, 수도권 대학으로 한정하다 보니 원래 가고 싶었던 신방과나 법대는 갈 점수가 안되었다.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영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수능 점수로 보아 영문과도 어렵다 판단했다.
제2외국어로 배운 일본어가 좋았지만 고등학교 일본어 담당 선생님 덕분에 일본어에 대한 흥미마저 흐려지고 말았다.
앞으로 ‘중국’이 발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정보에 이끌려 결국 전 세계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의 언어, 중국어를 전공하기로 했다.
사실 대학에 가기 전 중국어를 접해 본 적은 없지만, 다행히 한자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내가 중학생 때는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두꺼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TV로 영화를 보곤 했는데,
그때 주윤발, 곽부성, 양조위, 장학우 등이 나오는 홍콩영화를 참 재미있게 보았다.
알고 보니 내가 중국어라 알던 중국어는 홍콩지역에서 주로 쓰는 광둥어로 중국의 많은 사투리 중 하나였다.
수능점수와 중국의 잠재 성장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선택한 나의 대학 전공은 그 후로 나의 인생에 큰 방점을 찍었다.
엄마는 내가 외교관이 되길 바라셨다.
외교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마 잘 모르셨을 것이다.
그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전 세계를 일터 삼아 당당하게 일하는 본인의 꿈을 나에게 투영시키셨던 것 같다.
엄마는 내 돌잡이상에 영어 사전을 올려놓으셨다.
나는 하필 그 ‘영어사전’을 잡았고, 그 뒤로 연필까지 잡았다고 한다.
그러니 엄마는 내가 영어를 잘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어는 아니지만 어학계열로 진로를 정했고
대학 전공을 살려 대한민국 경찰 공무원이 되었으니, 돌잡이가 아주 억지는 아닌 듯하다.
대학 1학년 1학기 참새 짹짹, 병아리 삐약삐약처럼
중국인 교수님에게 중국어 발음과 성조를 따라 익히던 당시 나는 중국어를 잘하지 못했다.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성조도 어색했고,
잔뜩 혀에 힘을 주고 소리를 내야 하는 권설음(捲舌音)은 한참 따라 하고 나면 입안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땐 전공보다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과 회장을 했다.
우리 과는 신설학과로 위로 선배가 한 학년밖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3학년 2학기에는 전체 학우가 중국에 있는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2학년이 학과 회장을 하게 되는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무슨 생각에 학과 회장 선거에 나갔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학과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학과 공부보다는 그 밖의 학교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중국 학기는 9월에 시작한다.
중국 학기에 맞춰 2학기에 나가던 교환 학점 이수제가 갑자기 우리 때 3학년 1학기로 변경되었다.
한 마디로 나는 즐겁고 신나게 대학생활을 하다 중국어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중국 산동성 제남시에 위치한 산동대학(山東大學)이라는 곳이다.
물론 그곳에는 우리 학교 학생 말고도 전 세계 각지에서 유학 온 외국인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레벨테스트를 거쳐 분반이 되었고 나는 가장 레벨이 낮은 C반에 배정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배정받은 C반에는 한국 학생이 가장 적은 반이었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그리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는 유학생활에 적응해 갔다.
진짜 중국어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어릴 적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나는 어떻게 해야 말을 빨리 배울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최대한 몸으로 부딪혀라! 나는 매일 몸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